늑장 플레이로 가장 악명 높았던 골퍼는 1924년 US오픈 우승자 시릴 워커다. 1930년 LA오픈 2라운드 때의 일이다. 워커는 세컨드 샷을 하기 전 100~200야드씩 걸어가 그린을 살피고는 천천히 돌아오곤 했다. 그런 다음 쭈그리고 앉아 볼 주위 검불이나 마른 잎, 잔돌 등을 하나하나 들어냈다. 이어 이 클럽 저 클럽을 뽑아 대여섯 번씩 연습 스윙을 해봤다. 최종 선택한 클럽을 다시 예닐곱 번씩 휘둘렀다. 방향을 잡고 난 후에도 10여차례의 왜글을 해댔다.

후속조 선수들은 페어웨이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기다렸고, 나무그늘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기도 했다. 워커가 6번홀을 끝냈을 때 앞조는 11번홀의 티샷을 마쳤다. 경기위원이 경고를 했지만 워커는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9번홀에서 실격 통보를 했는데도 “감히 US오픈 챔피언을 건드리느냐”는 등 험담을 퍼부으며 플레이를 계속하려 했다. 결국 주최 측은 경찰을 불러 워커를 끌어냈다.

워커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느림보 골퍼는 있다. 미국 ‘골프닷컴’이 작년 3월 PGA투어 아널드파머인비테이셔널 2라운드 때 45명 선수들의 샷 소요 시간을 조사해 보니 미국의 닉 오헌이 평균 55초로 가장 느렸다. 지난 14일 플레이어스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늑장 골퍼라는 비난에 흔들려 우승을 놓친 나상욱도 50초나 걸렸다. 반면 미국의 신예 리키 파울러는 16초에 불과했다.

늑장 플레이 벌칙은 남과 여,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미 PGA투어는 페어웨이에선 40초, 그린에선 60초를 넘기지 않도록 했다. 첫 위반에선 경고, 두 번째는 1벌타와 함께 5000달러의 벌금을 물린다. 세 번째 위반은 2벌타와 1만달러, 네 번째 위반은 실격이다. 하지만 날씨, 경기 흐름 등을 감안하는 만큼 벌칙이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추어 중에도 18홀 내내 동반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느림보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대부분 “나는 아니다”고 확신한단다. 미심쩍은 골퍼는 미 골프다이제스트의 체크리스트를 참고할 만하다. 카트 안에서 다음 샷을 기다린다, 샷을 할 차례가 돼서야 잔디를 바람에 날려본다, 카트에서 내려 볼까지 50m 이상 걸어간 뒤 다시 카트로 돌아와 클럽을 꺼낸다, 그린 위에서 홀까지 10m 이상 남긴 트리플보기 상황인데도 열심히 퍼트 라인을 살핀다….

느림보 골퍼에게 대응하는 방법은 더 느리게 치는 것뿐이란 농담도 있다. 워커의 경우 공식기록원을 별도로 붙여 마지막 조로 혼자 돌게 했다고 한다. 골프 치기에 최적이라는 요즘이다. 왕따당하지 않으려면 적당한 속도를 지키시길.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