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나'를 증명하는 '또 다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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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토리 - 2030 기자의 아날로그 이야기
근대화 이후 인구이동 늘며 신원 확인 필요성 증가
호패·명부 등 전통 방식에서 홍채인식 등 증명법도 진화
근대화 이후 인구이동 늘며 신원 확인 필요성 증가
호패·명부 등 전통 방식에서 홍채인식 등 증명법도 진화
중세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던 1468년, 밀라노의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는 사부아 가문 출신의 보나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프랑스의 한 화가가 그린 보나의 초상화를 보고 한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가문 사이에 혼담이 오갔고 마침내 신부가 제노바에 도착했다. 스포르차 공작은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섰다. 그때 한 연락병이 숨을 헐떡거리며 밀서를 들고는 급히 그를 찾았다. 연락병은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했던 사절단이 보낸 편지를 공작에게 전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실물이 그림보다 훨씬 더 늙었음. 초상화에 다시는 눈길을 주지 말 것.”
보나와 만난 스포르차 공작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기록에는 보나와 결혼해 슬하에 세 자녀를 뒀다고 나와 있다. 프랑스로 갔던 사절단보다는 초상화와 실제 인물과의 괴리감을 공작이 덜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분증, ‘나’ 를 증명하는 수단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적인 담론을 뒤로 제쳐두고 생각하면 답은 어렵지 않게 나온다. 국가가 발급한 신분증이 답이다. 우리나라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공식적인 신분증으로 사용한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 미성년자가 아니란 사실을 입증하거나 다른 나라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 등 온갖 곳에서 신분증이 사용된다.
신분증을 들여다보면 이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신분증 속의 사람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다양한 증거들이 수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날인이 있기도 하다. 주민등록번호나 미국의 사회보장번호 등은 이 사람이 사회적 체계 내에 속한 사람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다.
○정체성의 어원은 ‘같은 것’
신분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identificati
on이다. 이 단어는 정체성(identity)이란 단어에서 파생됐다. 정체성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 등을 가리킨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체성을 뜻하는 라틴어 ‘이덴티타스(identitas)’는 유일함, 독특함이 아닌 특정 집단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들을 뜻한다. 어원인 ‘이뎀(idem)’이나 ‘이덴티뎀(identidem)’ 모두 ‘같은 것’이란 의미를 갖는다.
정체성이란 것이 개인보다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알려주는 용도였던 셈이다. 신분(身分)이란 단어도 개인이 속한 사회적인 위치나 계급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과거에는 의복 등을 이용해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나’란 존재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을 증명하는 것은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활동 반경이라고 해도 대개 태어난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상황에서 굳이 신분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 이뤄졌고 그 결과 지문이나 유전자감식 등 현대적 신원 확인 기술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진화하는 신분 증명 방식
개인을 증명하는 방법은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하게 진화했다. 관청의 인장이나 호패 등이 신분 증명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생김새나 피부색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주민의 명부를 작성한 곳도 있었다. 지금은 홍채인식, 유전자감식 등 과학적 방법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기도 한다.
사진 기술이 본격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은 그림, 즉 초상화였다. 하지만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화가의 취향이나 화풍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인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스포르차 공작도 그랬고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도 한스 홀바인이 그린 약혼자의 초상화와 실제 약혼자 사이의 괴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현재는 사진이 그림을 대체했지만 이마저도 그다지 정확하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정교하고 교묘한 ‘포샵’ 작업을 거친 카카오톡,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에 속아본 적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가문 사이에 혼담이 오갔고 마침내 신부가 제노바에 도착했다. 스포르차 공작은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섰다. 그때 한 연락병이 숨을 헐떡거리며 밀서를 들고는 급히 그를 찾았다. 연락병은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했던 사절단이 보낸 편지를 공작에게 전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실물이 그림보다 훨씬 더 늙었음. 초상화에 다시는 눈길을 주지 말 것.”
보나와 만난 스포르차 공작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기록에는 보나와 결혼해 슬하에 세 자녀를 뒀다고 나와 있다. 프랑스로 갔던 사절단보다는 초상화와 실제 인물과의 괴리감을 공작이 덜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분증, ‘나’ 를 증명하는 수단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적인 담론을 뒤로 제쳐두고 생각하면 답은 어렵지 않게 나온다. 국가가 발급한 신분증이 답이다. 우리나라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공식적인 신분증으로 사용한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 미성년자가 아니란 사실을 입증하거나 다른 나라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 등 온갖 곳에서 신분증이 사용된다.
신분증을 들여다보면 이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신분증 속의 사람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다양한 증거들이 수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날인이 있기도 하다. 주민등록번호나 미국의 사회보장번호 등은 이 사람이 사회적 체계 내에 속한 사람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다.
○정체성의 어원은 ‘같은 것’
신분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identificati
on이다. 이 단어는 정체성(identity)이란 단어에서 파생됐다. 정체성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 등을 가리킨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체성을 뜻하는 라틴어 ‘이덴티타스(identitas)’는 유일함, 독특함이 아닌 특정 집단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들을 뜻한다. 어원인 ‘이뎀(idem)’이나 ‘이덴티뎀(identidem)’ 모두 ‘같은 것’이란 의미를 갖는다.
정체성이란 것이 개인보다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알려주는 용도였던 셈이다. 신분(身分)이란 단어도 개인이 속한 사회적인 위치나 계급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과거에는 의복 등을 이용해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나’란 존재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을 증명하는 것은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활동 반경이라고 해도 대개 태어난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상황에서 굳이 신분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 이뤄졌고 그 결과 지문이나 유전자감식 등 현대적 신원 확인 기술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진화하는 신분 증명 방식
개인을 증명하는 방법은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하게 진화했다. 관청의 인장이나 호패 등이 신분 증명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생김새나 피부색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주민의 명부를 작성한 곳도 있었다. 지금은 홍채인식, 유전자감식 등 과학적 방법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기도 한다.
사진 기술이 본격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은 그림, 즉 초상화였다. 하지만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화가의 취향이나 화풍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인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스포르차 공작도 그랬고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도 한스 홀바인이 그린 약혼자의 초상화와 실제 약혼자 사이의 괴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현재는 사진이 그림을 대체했지만 이마저도 그다지 정확하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정교하고 교묘한 ‘포샵’ 작업을 거친 카카오톡,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에 속아본 적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