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역에 후쿠시마처럼 강도 9의 지진이 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 산업기반 와해로 국가경제는 긴 암흑기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강력한 지진에 대비하지 않는가. 역사적 경험과 과학적 추론에 따라 그런 지진이 우리나라에 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대규모 지진처럼 불확실하고 희귀한 일은 지난 1000년간 없었다고 앞으로 1000년 동안도 없을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과학도 관찰에 바탕을 두므로 경험이 부족한 과학적 추론은 불확실하다. 그렇다고 모든 시설물을 강도 9 지진에 견디도록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지진이 오지 않을 것으로 믿으면서 살고 있다. 원자력 발전도 비슷하다.

원전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하면 막대한 경제·사회적 피해가 발생할 것은 예견되는 일이며, 지금 일본 후쿠시마의 현실이다. 일본으로서 그나마 다행은 사고 당시 바람이 주로 바다로 향한 덕분에 사고 규모에 비해 피해는 크게 경감된 편이다. 바람이 계속 내륙을 향해 불었더라면 피해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일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지진 피해를 입지 않은 원전도 핵연료 교체 후 재가동을 연기하고 있어 전체 54기 원전 중에서 단 1기만 가동하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 와중에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원전 폐지 정책을 채택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우에 따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 확대 정책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정말 원전을 폐기해야 마땅한가. 원전보다 안전하고 인류적 과제인 온실가스 감축 의무 달성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경제적 경쟁력이 있는 에너지원이 있다면 원전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불행히도 아직 그런 에너지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장기적으로는 풍력이나 태양광과 같은 재생가능에너지에 기대를 걸지만 지금과 같은 에너지 대량 소비 사회를 뒷받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즉, 인류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에너지 내핍의 고통을 감수하는 국제적 환경이 성숙하기까지 적어도 반세기 동안은 농축된 에너지원이 다리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50여기 원전의 가동을 중단했는데도 견디지 않느냐는 반박도 있다. 그러나 그 견딤은 화석연료 발전 역량을 총동원하고 에너지 내핍을 강요하는 한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 정부도 원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고 있다. 안정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체가 생산기지를 우리나라를 포함한 외국으로 이전할 생각도 내비치고 있다.

인구는 많지만 에너지 부존자원은 거의 없는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재생가능 에너지원도 빈약해 선택의 폭이 작다. 안전하게만 운영할 수 있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원전이다.

정부는 일단 2030년까지 원전 확충계획을 세워놓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2050년까지는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이 불가피하다. 물론 이런 논리만으로 원전이 필수적이고 안심해도 좋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복잡하고 대량 에너지를 내장하는 원전에는 문제를 일으킬 복병이 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안다면 ‘복병’이 아니다. 원전의 설계, 입지, 건설 및 운영의 모든 단계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취약점을 최대한 밝혀 대비함으로써 복병이 숨을 곳을 최소로 만드는 것이 원자력 안전의 접근법이다. 최악의 원전 사고는 국가를 위기로 내몰 수 있음을 암시한 후쿠시마를 거울 삼아 필요한 설비를 더욱 보강해 안전도를 높여야 한다.

설비나 계통이 튼튼해도 이를 운전하는 사람이 잘못하면 위험해진다. 사람의 실수나 태업으로부터 원전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도 설계에 반영하지만 완전히 예방할 수는 없다. 역으로 사람이 잘하면 기계적 결함으로 인한 사고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원자력 관계자나 조직의 ‘안전문화’를 강조한다. 안전문화의 핵심은 안전 제일에 대한 신념과 책임감 그리고 솔직함이다.

이에 비춰볼 때 최근의 고리 원전 사건은 유감이고 우려할 사안이다. 후쿠시마에서 보았듯이 안전계통을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지극히 중요하다. 따라서 원전이 가동 중이든 정지 상태이든 전력 상실은 중대한 사건이고,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이를 밝혀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아야 한다. 고리 1호기 운영자가 그 사건을 은폐했다는 사실은 안전문화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원자력발전 회사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신뢰하지 못할 사람의 손에 원전을 맡길 국민은 없다. 운영자는 물론 감독관청이나 규제기관 모두 우리 원자력 안전문화를 성숙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국민이 방사선 위험을 보는 시각도 개선해야 한다. 후쿠시마 사고나 도로 아스팔트 방사능 오염 사건에 대해 시민이 보인 반응은 실제 위험의 정도보다 지나치게 민감했다. 과민반응은 부당한 사회 교란을 통해 스스로 피해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과민반응은 방사선 위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므로 상당 부분 에너지를 원자력에 의존하는 나라로서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숙명적 과제다.

조만간 북한은 위성 개발을 빌미로 또다시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제3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만약 우리 원전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위험을 1000년에 한 번으로 본다면 (정량적 평가는 없지만) 북한이 우리에게 핵공격을 감행할 위험은 그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북한 핵무기보다 우리 원전을 시급히 척결할 대상으로 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적으로도 원전 외의 대안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기존 국가 에너지 정책의 골격을 흔들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안전관리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만반의 조치는 필요하다고 본다.

정부는 사회적 찬반 논란에 휩싸여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총력 안전체제를 갖춤으로써 한시라도 빨리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우리가 필요해 선택한 우리 원전이다.

이재기 < 한양대 교수 >

△미국 일리노이대 핵공학 박사 △원자력안전기술원 실장 △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위원 △대한방사선방어학회장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