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두가 인정하는 ‘명품업계의 황제’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이다. 루이비통을 필두로 크리스찬디올 불가리 지방시 펜디 등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를 60여개나 거느리고 있어서다. 구찌 보테가베네타 이브생로랑 등을 산하에 둔 피노프랭탕르두트(PPR)그룹을 빼면 이렇다 할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명품의 대상을 ‘럭셔리의 종착역’이라는 시계로 한정하면 판도는 달라진다. 시계 업계를 주무르는 ‘임자’는 따로 있다는 얘기다. 스와치그룹과 리치몬트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스와치그룹은 스와치 론진 라도 오메가 블랑팡 브레게 등 19개 시계 브랜드를 통해 지난해 71억4000만스위스프랑(8조8700억원)의 매출을 올린 글로벌 ‘넘버1’ 시계 그룹이다. 까르띠에 몽블랑 바쉐론콘스탄틴 피아제 반클리프아펠 IWC 예거르쿨트르 등 18개 럭셔리 브랜드를 보유한 리치몬트그룹은 시계와 보석을 통틀어 한해 100억달러(11조3000억원) 이상 벌어들이는 시계·보석 분야의 ‘지존’이다. 시계만 놓고 보면 스와치그룹이, 시계와 보석을 합치면 리치몬트그룹이 각각 세계 1위인 셈이다.

‘시계의 나라’ 스위스를 먹여살리고 있는 두 그룹의 창업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모두 스위스 출신이 아니다. 1983년 스와치그룹을 설립한 니컬러스 하이에크 회장은 레바논 출신이며, 1988년 리치몬트그룹을 만든 앤턴 루퍼트 회장의 고향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시계도 패션”…스위스 시계산업 구세주

1980년대 초 스위스 시계업계는 ‘그로기’ 상태였다. 1970년대 중반 세이코 시티즌 등 일본 업체들이 내놓은 쿼츠시계(배터리에서 동력을 얻는 전자식 시계) 탓이었다. 쿼츠시계는 500년 역사의 기계식 시계(배터리 없이 태엽을 감거나 손목의 움직임으로 동력을 얻는 시계)를 모든 면에서 압도했다. 훨씬 더 정확하고 가벼운데도 가격은 10분의 1에 불과했다.

기계식 시계만 고집했던 스위스의 시계 생산량은 1974년 9100만개에서 1980년대 초 4000만개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100년 역사의 스위스 시계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쓸모가 없어진 장인들은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오메가와 티쏘를 거느린 SSIH, 론진과 라도 등을 보유한 ASUAG도 ‘일본발(發) 쿼츠 위기’의 파고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부도 위기에 몰린 두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받은 채권단은 회사를 살릴 ‘구원투수’로 하이에크 회장(1928~2010)을 낙점한다. 당시 하이에크는 1957년 자신이 세운 컨설팅업체(하이에크 엔지니어링)를 이끄는 경영자이자 ‘잘나가는’ 경영 컨설턴트였다. 네슬레 지멘스 등 유명 기업을 컨설팅하는 과정에서 쌓인 그의 명성이 채권단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이에크의 해법은 이랬다. 일단 SSIH와 ASUAG를 합병해 조직을 슬림화한 뒤 일본 쿼츠시계에 맞설 수 있는 저가 시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평생 모은 재산과 외부 투자금을 끌어모아 합병회사의 경영권을 인수하더니 1983년 신개념 시계인 스와치를 선보였다.

스와치는 지금의 아이폰과 같은 존재였다. ‘시계는 한번 사면 평생 쓰는 제품’이라고 여기던 당시 사람들에게 “시계도 패션이다. 값싸고 예쁜 시계를 여러 개 구입해 마치 옷처럼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시계를 착용해보라”는 식으로 생각의 틀을 바꿔놓아서다.

하이에크는 100개가 넘는 부품 수를 50여개로 줄이고 플라스틱 소재를 쓰는 방법으로 75달러 안팎이던 일본 시계의 반값에 스와치를 내놓았다. 여기에 당시 시계업계에서 ‘금기’로 여기던 빨강 파랑 초록 등 화려한 색상을 입히고, 3~6개월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았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패스트 패션’ 개념을 30년 전 시계에 접목했던 셈이다. 저렴한 가격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스와치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저가 시계인 스와치로 쓰러져가던 회사를 살려낸 하이에크의 눈은 차츰 명품 시계로 옮아갔다. 쿼츠 열풍이 가라앉으면 명품시계 수요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저렴한 패션시계(스와치 플릭플락)부터 중저가(티쏘 ck 해밀턴), 중고가(론진 라도), 고가(오메가), 최고가(브레게 블랑팡)로 이어지는 ‘황금 라인업’을 갖춘 스와치그룹은 명실상부한 시계업계의 제왕이 된다.

◆남아공 담배재벌, 명품에 눈을 뜨다

리치몬트그룹의 창업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담배 재벌인 루퍼트 회장(1916~2006)이다.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석사학위(화학)까지 땄지만, 학문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루퍼트가 눈여겨 본 아이템은 담배였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담배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시작은 초라했다. 그는 요즘 돈으로 200만원을 투자해 자신의 집 창고에서 담배를 만들었다. 그의 예상대로 담배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가 세운 담배회사(렘브란트)는 나날이 성장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영국 담배업체 로스만과 카레라를 잇따라 인수한 뒤 로스만으로 통합시켰다. 훗날 세계 4위 담배업체로 성장한 로스만은 1999년 세계 2위 담배업체인 브리티시아메리칸타바코(BAT)에 합병됐다.

그는 담배로 벌어들인 돈으로 여러 사업에 투자했다. 투자회사를 차린 뒤 와인에서부터 은행, 병원, 방송, 금·다이아몬드 광산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루퍼트가 명품에 눈을 뜬 것도 이즈음이었다. ‘투자의 귀재’답게 향후 명품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본 것이었다. 1960~1970년대 알프레드 던힐, 몽블랑, 까르띠에 등을 손에 넣더니 1988년 스위스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회사 리치몬트를 설립해 본격적인 ‘명품 브랜드 사냥’에 나섰다. 바쉐론콘스탄틴 반클리프아펠 예거르쿨트르 IWC 랑게운트죄네를 차례로 접수했다. 중저가부터 명품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브랜드를 산하에 둔 스와치그룹과 달리 루퍼트는 최고급 명품 브랜드로만 포트폴리오를 짰다.

◆외향적인 하이에크 vs 내성적인 루퍼트

하이에크와 루퍼트는 성격이나 경영 스타일 등 여러 면에서 달랐다. 하이에크는 컨설턴트 출신답게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평소 양 손목에 각각 4개씩, 모두 8개의 시계를 차고 다니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였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내 모습을 본 사람들마다 ‘왜 이렇게 많은 시계를 차느냐’고 묻지 않겠느냐. 덕분에 나는 항상 시계 얘기로 대화를 시작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반면 루퍼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평생 남아공에 살면서 언론 인터뷰도 꺼릴 정도였다.

하이에크는 사업에 ‘올인’했지만, 루퍼트는 정치 환경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하이에크는 2010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매일같이 회사에 출근했다. 스와치그룹 외에 자신이 설립한 컨설팅회사를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챙겼고, 친환경 자동차 개발에도 열정을 쏟아부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내놓은 초소형 자동차 ‘스마트’의 기초 모델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하이에크다.

루퍼트는 상대적으로 오지랖이 넓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조국의 정치 상황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공공연하게 반대하며 흑인 사회를 도왔다. 구금 중이었던 넬슨 만델라가 풀려나 훗날 남아공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루퍼트는 또 세계 최대 민간 자연보호단체인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을 창립하는 등 환경 보호에 많은 공을 들였다.

경영 스타일도 달랐다. 하이에크는 평소 “훌륭한 기업가는 예술가와 비슷해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말라했다. 일도 직접 챙기는 편이었다. 반면 루퍼트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은 뒤 이에 맞게 회사를 이끌어가는 스타일이었다.

활동무대가 각각 스위스(하이에크)와 남아공(루퍼트)으로 멀리 떨어졌던 탓에 하이에크와 루퍼트는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남 요한 루퍼트는 나이차가 22세나 나는 하이에크와 이따금씩 만나며 우정을 나눴다. 2010년 하이에크가 사망했을 때 요한 루퍼트는 이런 글을 리치몬트그룹 홈페이지에 올렸다.

“나의 친구이자 멘토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깊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그는 스위스 시계산업을 살린 진정한 리더이자 구세주였으며,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이에크 회장을 알고 지내는 행운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할 겁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