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북한은 혹독했다.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던 북한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을 주민들에게 강요했던 시기였다. 굶어 죽은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함경북도 은덕군의 한 아파트에 살던 박모씨(52)는 어느 더운 여름날 친하게 지냈던 옆집 남자의 시체를 봤다. 사인은 아사(餓死·굶어 죽음)였다. 18가구가 살던 그 아파트에선 그해 7가구에서 아사자가 발생했다. 옆집 남자의 시체가 그 아파트에서 나가던 날, 박씨 가족은 탈북을 결심했다.

그렇지만 남한으로 온 박씨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북한에 있을 때 전기기계 회사에서 일했던 박씨는 한국에 와서 3개월 만에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땄으나 어느 곳도 박씨를 받아주지 않았다. “몸이 성치 않은 것 같은데….” “당신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듣겠소.” 대부분의 회사는 박씨의 말투나 경력, 학력, 체구를 문제 삼았다. “한국에 처음 와서 일만 시켜주면 뭐든지 하겠다는 열정으로 구직 활동을 몇 년간 했었는데, 자격증이 있으면 뭐합니까. 탈북했다고 하면 쓰려고 하지 않아요.” 그 이후 박씨는 건설현장을 전전하다 현재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북한이탈주민(탈북자)들은 남한으로 건너와 사회의 하층을 이룬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박씨처럼 일용직 일자리를 전전하거나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며 살아간다.

◆여전한 편견과 차별

취업에 실패한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고용주들의 ‘편견’과 ‘차별’이 취업에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에 온 지 5년째인 이모씨(37)가 처음 일했던 곳은 컴퓨터 부품 조립공장. 수습기간인 3개월간 시급 3500원을 받기로 하고 일한 결과 첫달 통장에 찍힌 액수는 100만원이 안 됐다. 주말에 일한 부분은 돈을 받지 못했다. 입사 동기였던 남한 동료는 150만원을 받았다. “남한 동료보다 야간, 주말 근무를 훨씬 많이 했는데 내 월급이 왜 더 적으냐”고 항의했으나 회사 측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일한 시간에 비해 업무 효율성이 너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이게 탈북자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후 자동차 부품공장 취업은 신중하게 결정했다. 그렇지만 그곳의 처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월급이 당초 받기로 했던 것보다 20만원 적게 나왔던 것. 항의했지만 “취업 중개 수수료를 회사에서 부담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취업 중개업체에서는 회사에서 수수료를 따로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회사는 이를 이씨의 월급에서 뗐다. 이씨는 공장을 그만두고 한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2년째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이씨는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 생활하기는 빠듯하지만 여기저기서 속았던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속은 편하다”고 토로했다.

탈북자들의 말투도 취업엔 감점 요인이다. 2008년 한국에 온 김모씨는 1년간 간호조무사 교육을 받고 병원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김씨는 “조무사를 구한다고 해서 한 병원에 전화하니 ‘환자를 대하는 직업인데 억양이 너무 세서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간호조무사를 뽑는 한 산부인과에 환자인 척하고 들어가 원장에게 “간호조무사로 일하게 해달라. 잘할 수 있다”고 사정해 겨우 취직 자리를 구했다.

학력도 걸림돌이다. 2011년 3월 한국에 도착한 탈북자 김모씨(29)는 1년 넘게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탈북 후 한국에 오기까지 5년간 중국에서 살았던 그는 중국어에 자신이 있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토대로 대전의 한 호텔이 뽑는 중국 관광객 상대 가이드 직에 원서를 냈다가 퇴짜를 맞았다.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씨는 북한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그 이후 광주에 있는 휴대폰 조립공장에도 원서를 냈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이후 식당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기저기 원서를 써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김씨는 “막막한 마음에 중국한어수평고시(HSK) 1급 자격증을 땄으나 여전히 한국 청년들의 ‘스펙’을 따라가기엔 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외면받는 4050 탈북자

전체 탈북자의 26%를 차지하는 40대 이상은 나이와 건강 때문에 외면받기 일쑤다. 함씨는 “건설현장 인부로 일하려고 현장에 갔지만 혈압을 재보고 ‘돌아가라’고 한다”며 “혹시라도 일하다 쓰러지면 현장에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도중 중국에서 세 번 북송당해 고초를 겪으며 고혈압, 당뇨, 협심증을 얻었다.

탈북을 시도하다 중국에서 감옥살이를 하거나 북송돼 고초를 겪는 탈북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혈압, 당뇨 등 신체적 질병뿐 아니라 우울증 등 정신질병까지 얻어온다. 함씨는 “노인도 아니고 젊은이도 아닌 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건강 때문에 답답하다”며 “차라리 빨리 노인이 돼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2010년 2월 한국에 온 이모씨(49)는 “탈북자 대상 취업설명회에 가서 청소부 일을 지원했다가 나이가 너무 많다며 퇴짜를 맞은 것이 수차례”라며 “나이 많은 탈북자들은 업무 습득능력이 떨어지고 억양을 고치기가 쉽지 않아 일용직 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2010년 6월 한국에 온 이모씨(54)도 마찬가지다. 그는 “북한에서 온, 그것도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식당일 아니면 청소일”이라며 “그마저도 구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심성미/김보영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