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천재 '황금곰' vs 그린 위 '제임스 딘'…"이젠 비즈니스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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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 (25) 잭 니클라우스-아널드 파머
1962년 US오픈 '운명의 맞대결'
최고의 선수 파머 꺾은 니클라우스, 11살 차이 나지만 동갑내기처럼 경쟁
명예의 전당 입성·투어 은퇴도 함께
만능 스포츠맨과 TV 골프스타
니클라우스, 메이저 최다승 18승 기록…파머는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좌절
오히려 인기 올라…17년간 연달아 우승
1962년 US오픈 '운명의 맞대결'
최고의 선수 파머 꺾은 니클라우스, 11살 차이 나지만 동갑내기처럼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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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라우스, 메이저 최다승 18승 기록…파머는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좌절
오히려 인기 올라…17년간 연달아 우승
반면 잭 니클라우스(72)는 프로가 된 20대 초 ‘팻 잭(Fat Jack)’으로 불리며 뚱뚱보라는 놀림을 받았다. 니클라우스는 자신보다 실력이 모자라는 파머의 인기가 높은 것을 못마땅해했고 그래서 더욱 그를 이기려고 했다. 이런 니클라우스를 파머는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니클라우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황금곰(golden bear)’을 보면 돼지라고 비웃었다.
둘은 골프 코스를 디자인하면서도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니클라우스는 1974년 고향인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뮤어필드빌리지GC를 만들고 그곳에서 ‘더 메모리얼’이라는 PGA투어까지 만들었다. 이에 자극받은 파머는 1979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베이힐골프장을 지어 ‘베이힐클래식’(현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을 창설했다.
공식 투어 활동에서 은퇴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둘은 전 세계 골퍼들의 수입 랭킹에서 여전히 3, 4위를 달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62년 US오픈 연장전 숙명의 맞대결
1958년 마스터스에서 첫 우승을 따낸 파머는 당시 최고의 선수였다. 그해 PGA투어 상금왕에 올랐고 1960년에는 마스터스와 US오픈을 동시에 석권했으며, 상금왕과 올해의 선수상까지 거머쥐는 등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파머의 전성기에 니클라우스는 그를 견제할 대항마로 자라고 있었다. 1960년 니클라우스는 아마추어 신분으로 US오픈에 출전해 파머에 2타 뒤진 2위를 차지했다. 당시 니클라우스가 작성한 4라운드 합계 2언더파 282타는 아마추어 최소타 기록이다.
1962년 니클라우스가 프로가 되면서 둘의 라이벌 관계는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을 시대의 ‘라이벌’로 만든 대사건은 그해 US오픈이었다. 니클라우스와 파머는 최종 합계 1언더파 283타로 동타를 이룬 뒤 18홀 연장전에서 운명적인 맞대결을 펼쳤다. 니클라우스가 71타를 쳐 74타를 친 파머를 꺾고 프로 데뷔 첫승을 따내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당시 대회장은 펜실베이니아 오크먼드CC로 파머의 홈코스나 다름없었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파머가 열한 살이나 어린 22세의 니클라우스에게 당한 패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우승으로 니클라우스는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1963년 파머가 2년 연속 상금왕 타이틀을 차지할 때 니클라우스는 10만달러 차이로 2위를 했으나 이듬해 81달러 차이로 파머를 제쳤다. 마스터스에서 둘의 경쟁은 대단했다. 1962년에는 파머가 우승했고, 1963년에는 니클라우스가 우승했으며 1964년에는 다시 파머, 1965년에는 니클라우스가 우승컵을 안았다.
○천부적인 운동 소질을 가진 니클라우스
니클라우스의 닉네임 ‘황금곰’은 그가 나온 오하이오의 ‘어퍼 알링턴 고교’ 스포츠팀 마스코트에서 유래했다. 니클라우스는 고교 시절 농구에도 재능을 보여 대학농구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풋볼 야구 테니스 등 모든 운동에 능했다.
그의 운동감각은 아버지 찰리에게 물려받았다. 찰리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오하이오주립대 풋볼 선수였고 세미프로 선수로도 활약했다.
10세 때 골프를 시작한 니클라우스는 생애 첫 9홀 라운드에서 51타를 쳤다. 12세에 오하이오주 주니어대회에서 첫 우승을 했고, 13세에 첫 60타대 스코어를 기록했다.
니클라우스는 1966년 4대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데 이어 1971년에도 4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해 두 차례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첫 선수가 됐다.
그의 피날레는 1986년 마스터스 사상 최고령 우승이었다. 46세의 니클라우스는 최종일 마지막 10개홀에서 7언더파를 치는 무서운 집중력을 선보이며 마스터스 여섯 번째 우승과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메이저 최다승(18승)의 대위업을 완성했다. 그는 PGA투어 통산 73승 등 프로 통산 115승을 거뒀다.
○최초의 TV 골프스타가 된 파머
파머는 인기면에서 니클라우스를 압도했다. 신은 니클라우스에게 재능, 파머에게는 인기를 안겨줬다. 최근 10년 넘게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타이거 우즈와 필 미켈슨을 연상시킨다. 파머의 팬들이 어찌나 열광적이었던지 그들은 ‘아니스 아미(Arnie’s Army·아니의 군대)’로 불렸다.
세계 최대 매니지먼트사 IMG를 세운 마크 맥코맥은 1960년 파머와 첫 계약을 맺은 뒤 그와 함께 성장했다. 둘의 파트너십은 스포츠 마케팅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파머는 니클라우스의 라이벌이었지만 평생 넘지 못한 숙원도 있다. 그는 마스터스를 네 차례(1958, 1960, 1962, 1964년) 제패했고 1960년 US오픈 우승, 1961년과 1962년 브리티시오픈 2연패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PGA챔피언십 우승컵을 안지 못해 ‘커리어 그랜드슬램’ 완성에 실패했다. 파머의 안타까운 대기록 달성 실패는 오히려 팬들의 애정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파머는 1960년 마스터스와 US오픈을 잇따라 제패한 뒤 브리티시오픈까지 거머쥐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날아갔다. 1953년 한 시즌에 3개 대회에서 우승한 벤 호건의 위업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1타차로 우승에 실패했다. 대신 그는 1961년과 1962년 브리티시오픈을 2연패함으로써 아쉬움을 달랬다.
니클라우스는 1968, 1969년 2년간 무승의 수모를 당했지만, 파머는 1955~1971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우승컵을 안았다. 1971년에는 4승을 거뒀다. 파머는 PGA투어 통산 62승 등 프로 통산 95승을 해냈다.
○은퇴 뒤에는 비즈니스로 라이벌 관계
니클라우스와 파머는 지금도 프로골퍼 수입 랭킹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골프전문잡지 골프다이제스트가 지난해 전 세계 프로골퍼들이 투어에서 활약하며 벌어들인 상금(on course)과 계약금, 출전료, 라이선스비 등 코스 밖에서 벌어들인 상금(off course)을 합쳐 발표한 수입 현황에서 파머는 당당히 3위에 올랐다. 파머는 의류사업 등으로 코스 밖에서만 36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니클라우스는 코스 설계 비즈니스 등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2895만5000달러를 모아 4위를 차지했다.
니클라우스는 1969년 세계적인 코스 디자이너 피트 다이와 하버타운GL을 시작으로 코스 설계에 나섰다. 아들들과 ‘니클라우스 디자인’을 설립, 전 세계에 300개 이상의 코스를 디자인했다. ‘아널드 파머’ 의류 브랜드로 유명한 파머도 ‘아널드 파머 디자인 컴퍼니’를 설립해 200개 이상의 골프장을 설계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