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군. 낮에는 또 어떤가. 거리 가득 왁자지껄 행인들의 떠드는 소리. 장사꾼의 호객 행위. 참, 너무도 번잡스러워. 언제쯤 어린 시절의 양치던 고향의 들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노르망디 셰르부르(뮤지컬 영화 ‘셸부르의 우산’의 무대) 부근의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태어난 장 프랑수아 밀레(1814~75)는 직업상 여러 차례 파리에 머물렀지만 늘 소란스런 도시를 떠나 전원에 정착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꿈으로만 머물러있을 뿐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파리의 보자르에 다니면서 로마대상에 두 차례 도전했지만 결국 미역국만 잔뜩 마신 채 단념하고 말았다. 고향인 셰르부르 시에서 제공하던 향토장학금도 끊겼다. 이런 상황에서 더럭 결혼까지 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첫 번째 부인은 가난의 늪에서 허덕이다가 폐병에 걸려 일찌감치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상심한 그는 고향에 내려갔다가 두 번째 부인이 될 카트린 르메르를 만난다.

사랑을 통해 삶의 의욕을 회복한 밀레는 다시 파리로 올라가 몽마르트르 부근에 신접살림을 차린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지기인 데오도르 루소, 풍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와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가난은 쉽사리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엔 누드화에 손을 댔다. 화가의 자존심을 깡그리 내던진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 사이 친구 루소는 자연을 찾아 파리 부근의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바르비종은 파리 외곽 퐁텐블로 숲 부근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했다. 이미 많은 화가들이 이곳의 풍경을 담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다. 이곳이 유명해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파리는 급속도로 팽창해갔고 소음과 매연이 가득한 곳이 됐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의 전원 풍경화가 파리 살롱전을 통해 소개되자 화가들의 열광은 극에 달했다. 특히 젊은 풍경화가들은 자연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골몰했던 전통 풍경화를 내던지고 실재하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자 했다.

루소는 일찌감치 보따리를 쌌지만 밀레는 여전히 살롱전의 입선을 통한 제도권 미술계에서의 출세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신화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가지고 줄기차게 살롱전을 노크했지만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1847년 ‘나무에서 떨어진 오이디푸스’로 단 한 차례 입선했을 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그러던 중 파리에 콜레라가 만연하자 그는 친구가 있는 바르비종으로 몸을 피한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신에게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자연에 빠져들었다.

바르비종 화파의 화가들이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데 머물렀던 데 비해 밀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대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농민들의 소박한 삶에 주목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 노동행위를 숭고하고 경건한 차원으로 승화했다.

그토록 밀레를 거부했던 살롱이 그에게 호의적으로 손을 내민 작품들이 그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물론 처음엔 농민들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렇지만 1864년 마침내 보수적인 살롱전 심사위원들도 이 농민화가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양치기 소녀’에 대상을 수여한 것이다.

해 지기 전의 드넓은 들판에 서서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 양치기를 묘사한 이 작품은 농촌의 서정적 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농민의 평범한 삶을 찬미하고 있다. 이 그림은 저녁 무렵 들판에서 기도하는 농부를 담은 ‘만종’을 연상케 하는데 손을 맞잡은 소녀의 자세가 경건한 모습으로 비쳐져 최근까지도 기도하는 모습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드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양들은 마치 ‘허들링’하듯 방사상으로 무리 지어 열심히 풀을 뜯고 있고 석양에 반사된 황금빛 들판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그것은 화가자신이 오래도록 꿈꾸던 이상적인 경지이자 19세기 도시민들이 꿈꾸던 로망이기도 했다. 특히 양치기 목자의 이미지는 예수와 성자를 양치기로, 신자를 양으로 묘사하던 기독교의 전통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비평가들의 호감을 샀다.

밀레의 고요한 목가적 세계는 곧 신과 인간문명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재발견을 의미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차가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농민의 순박한 정신과 하나가 된다.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캉틀루브 '오베르뉴의 노래' 중 '바이레로'

땅거미가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인 무렵 청년의 눈앞에 오베르뉴 고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한동안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양치기 소녀의 노래가 온 계곡에 메아리쳤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끌려 청년은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산을 오르며 그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소녀의 노래가 끝날 무렵 희미한 목동의 노래가 그 위에 오버랩됐다. 소녀와 같은 노래였다. 그 목소리는 족히 6㎞ 이상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소년 목동이 소녀 목동에게 보내는 입맞춤처럼 느껴졌다.

24세의 청년 음악도 조제프 캉틀루브(1879~1957)가 1903년 어느 날 경험한 오베르뉴의 인상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훗날 작곡가 겸 민요연구가가 된 그는 1923년부터 7년에 걸쳐 27곡의 오베르뉴 민요를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프라노 곡으로 편곡해서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곡은 바로 그날의 신비롭고 로맨틱한 인상을 담은 ‘바이레로’(목동의 노래)였다.

그 날의 잔잔한 여운을 생생히 담았기 때문일까. 이 곡은 오늘 날까지 성악가들이 즐겨 부르는 소프라노의 스탠더드 넘버가 됐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오베르뉴 고원의 목가적 풍경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

“목동이 냇물을 건너네. 넌 즐거운 시간을 보낼 틈이 없지. 바이레로를 불러보렴./ 목동아. 초원에 꽃이 만발하였단다. 네 양들을 이리 몰고 와 함께 바이레로를 부르자./ 목동아. 냇물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구나. 난 건널 수가 없으니 어쩌나. 바이레로를 부르자.”

▶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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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문화전문기자ㆍ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