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금단의 열매' 따먹은 판사
살다보면 직업윤리라는 것이 있다.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지만 일단 그 직업을 선택하면 그에 걸맞은 규범을 지켜야 한다. 조그마한 빵 가게 주인이 자신의 장사가 안 된다고 하여 경쟁 가게의 빵을 사서 쥐를 집어넣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직업윤리에 맞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직업윤리 가운데는 비교적 공통적인 게 있다. 직무상 알게 된 고객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환자의 병을 떠벌리면 어떻게 될까.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변호하는 고객의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직무상 비밀을 지키는 데 가장 유명한 전통이 가톨릭교회에서 준수되고 있는 ‘고해의 비밀’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고백성사라는 게 있어 신자들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신부도 같은 사람인데 고해소에서 들은 죄를 혹시 누설하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한다.

하지만 가톨릭의 역사를 보면 이 고해의 비밀은 자물쇠처럼 굳게 지켜져 왔다. 중세 유럽의 어느 왕은 왕비의 불륜을 의심하며 왕비의 고해신부에게 고해성사 때 왕비에게서 들은 죄를 털어 놓으라고 했다. 이에 문제의 신부는 고해의 비밀을 누설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한국 사법부의 판사는 어떠한가. 사법부의 판사야말로 성직자의 직무와 비슷하다. 죄의 유무는 물론 벌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함을 넘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엄숙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최근 한 판사가 판결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법부의 판결을 다룬 한 영화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자신이 관여한 판결의 과정을 소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털어놓는 소회부터가 정상적인 판사에게서는 들을 수 없을 만큼 비장하다. “저는 이제 실정법을 어기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직판사가 작심을 하고 불법 행위를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재판의 합의는 공개하지 아니한다”는 법원조직법 제65조의 조항을 어겼으니 처벌을 각오한 것이고 법관징계법에 따라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판결의 비밀이 누설됐다는 점이다. 판사가 판결의 비밀을 누설한 사실이 심각한 것은 가톨릭 신부가 자신에게 고백성사를 한 사람의 죄를 공개하고 정신병 의사가 자신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의 치료과정을 공개한 것과 조금도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억울해한다. 피고가 있고 원고가 있으며 변호사도 있고 검찰도 있다. 이처럼 다툼의 요소가 있는 상황에서 판사의 판결에는 언제나 불만의 소지가 있다. 그 불만의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이 바로 법원의 비밀일 터이다.

그 비밀이란 참으로 ‘금단의 열매’와 같다. 신은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지상낙원에 살게 한 다음 오직 한 가지의 금령을 부과했다. 다른 모든 과일은 다 따먹어도 좋지만, 한 나무의 과일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혹은 거셌다. 뱀은 유혹한다. “신처럼 될까봐 과일을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브와 아담은 유혹에 넘어가 과일을 따먹는다. 하지만 금단의 과일을 따먹은 다음의 결과는 어땠나. 신이 됐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자신이 벌거숭이가 됐다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겠다고 하여 판결의 비밀을 누설한 판사여! 그대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다. 판결의 비밀을 털어놓으면 여론의 재판에서 무죄가 되리라는 기대를 했을는지 모르나, 그 결과는 벌거벗음이다. 법관이 억울함을 면하기 위해 판결의 비밀조차 누설하면 어떻게 신성한 재판이 될 수 있나. 자신의 몸은 이왕 벌거벗었다고 하지만, 사법부까지 벌거벗은 몸이 되는 것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하나. ‘벌거벗은 왕’처럼 ‘벌거벗은 사법부’가 어떻게 권위를 되찾을지 궁금하다.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