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행복한 사람 그대는 여행자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한다. 변호사 10년 하면 지겹다고 하는데 필자는 25년째 변호사 생활을 지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다양한 사회활동과 취미생활을 해온 덕분이다. 30대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낮에는 로펌에 근무하고 저녁과 주말엔 저서와 논문 집필에 매달렸다. 40대 들어와 좀 더 내게 충실한 삶을 살고자 여름에 한 나라씩 여행하기로 했다. 처음엔 패키지투어를 했는데 빡빡한 일정이라 하와이에서 정작 와이키키해변은 눈도장만 찍는 식이다. 적어도 해변에서 반나절은 보내야 하지 않나. 호텔만 예약하고 차를 빌려 가족과 내키는 대로 다니며 충분한 휴식도 취한다. 느긋하고 자유로우면서 모험의 기분이 든다.

여행의 주제는 대개 바다와 미술이다. 어린 시절 만리포에서 보낸 추억과 워낙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파도가 해변에서 부서지는 걸 보며 쏴 소리를 듣노라면 종일 있어도 좋다. 눈부신 태양은 덤이고 젖은 모래를 밟는 서늘한 느낌은 환상적이다.

미술관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입체파 그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시뮬레이션해 보여준 것은 아주 흥미로웠다. 인상파 화가들이 많이 살았던 프로방스 지방에 언젠가 한 달 정도 머물며 그들의 고뇌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다.

새로운 곳에 가면 가슴이 뛴다. 두바이에서 지프로 거칠게 사막을 질주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르즈 칼리파 빌딩에 올라본 것,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몽골의 아름다운 대초원에서 승마 체험이 좋았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에 유토피아로 묘사된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에 가보았다. 쿤룬산맥 서쪽 끝 해발 3000m 아슬아슬한 산길을 한참 갔는데 아름다운 강과 푸른 하늘, 광막한 초원의 소박한 자연미에 마음이 설레었다. 도쿄 간다 서점가를 찾았을 때 아버지가 신간 시집을 보며 흐뭇해 하시던 기억이 푸근하고,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와의 하와이 여행도 참 즐거웠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본 탱고에서 세련된 정열을, 바르셀로나 플라멩코에선 힘찬 기백을 맛보았다. 고색창연한 에든버러성이 아름답기는 했으나 때로는 전쟁과 반란으로 피에 얼룩진 스코틀랜드 왕실 역사를 듣고 비감에 젖기도 했다. 와인의 본고장 보르도에서 모든 방향에서 햇빛을 잘 받을 수 있게 포도나무 가지를 사정없이 짧게 깎아 측은했던 기억도 난다.

통일이 되면 아버지 고향 함경북도 종성 행영마을에 달려가 사촌들과 아버지 시에 나오는 이름 없는 산, 느릅나무, 우물, 신작로, 솔개에게 정겨운 인사를 하고 싶다. 황홀한 통일여행이 될 것이다.

김현 <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hyunkim@sechangla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