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사무실의 화성인들,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화성에 살고 있는 상상의 지적(知的) 생물. ‘화성인(火星人)’의 정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도 화성인은 실재한다.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그런 화성인 말이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정신 세계를 가진 화성인들은 직장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자신만의 행동양식들을 보유한 이들은 평소엔 멀쩡해 보이다가도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낸다.

둘러보라. 때론 어이없고 가끔은 섬뜩하기까지 한 화성인들은 ‘상상 속 지적(知的) 생물’이 아니라 ‘현실 속 지적(指摘)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으로 주변에 산재해 있다. 직장 내 퍼져가는 화성인 바이러스에 지구인들은 그저 유형별 충격 방지 백신을 접종하고 싶을 뿐이다.

◆세수女 다도男…난 소중하니까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정 대리는 ‘세수녀’로 통한다. 그는 매일 오후 3시면 자리를 비운다. 잠시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번 가면 30분 이상이다. 클렌징오일과 클렌징폼으로 깨끗하게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한 후 출근 전 공들여 다듬은 얼굴에 기초 화장에서 색조화장까지 처음부터 다시 한다.

정 대리는 “화장하고 5~6시간 정도 지나면 피부도 숨쉴 틈을 가져야 한다”며 “좋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성”이라고 말한다. 각종 화장품을 진열해놓고 장시간 세면대를 독차지하는 정 대리 때문에 이런 사정을 아는 같은 층 여직원들은 3~4시 사이면 아예 볼일을 좀 참고 만다.

최 대리는 ‘다도남’이다. 평소 다도(茶道)를 즐기는 그는 회사에서도 제대로 녹차를 우려내 마신다. 하지만 그의 고상한 취향에 주변에선 속이 탄다.

같은 팀 김 과장은 “회의 시작한다고 하면 다들 커피 믹스나 한 잔 타서 들어가는 게 보통인데 이 눈치 없는 후배는 그제서야 녹차잎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며 “회의마다 늦는 데다 들어와서도 녹차 물 떨어지는 거 보느라 회의는 뒷전”이라고 말했다. 오늘도 최 대리는 질 떨어진다며 녹차티백은 들여놓지도 못하게 하고 혼자 다기 세트를 달그락거리며 녹차를 홀짝이고 있다.

금융사 마케팅팀의 김 과장은 말 그대로 ‘공주’다. A4용지 5장 이상은 직접 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품 소개용 전단지 샘플 뭉치를 운반할 때는 물론이고 책을 서너권 정도 들어야 할 때면 특유의 고고한 목소리로 남자 동료를 부른다.

그런 김 과장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지난해 가을 체육대회. 다들 줄다리기, 달리기 등에 참여하거나 응원전을 펼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김 과장은 우아한 레이스 양산을 쓰고 천막 밑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서도 김 과장의 손은 바빴다. 행여나 햇빛에 탈까 자외선 크림을 쉴새 없이 덧바르느라 팀의 승리따윈 관심에도 없었다.

◆그 남자, 혹은 여자의 이중생활

외국계 투자회사에 근무하는 이 대리는 퇴근 후 나이트클럽에 갔다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같은 부서 홍 사원을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홍 사원은 계절별로 두세 가지 같은 옷을 돌려입고 두꺼운 뿔테에 머리는 질끈 묶고 다니는 수수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밤은 달랐다. 진한 화장에 감각적인 패션, 클럽에서는 이미 잘 노는 손님으로 유명인사였다. 이 대리는 “회사에선 수줍게 인사만 하던 홍 사원이 활발하게 먼저 다가와 아는 척을 해 놀랐다”며 “그 뒤에도 회사에선 여전히 수수한 모습으로 일만 해 한번 더 놀랐다”고 말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정 대리의 이중생활은 정반대다. 정 대리는 주변 직장인들로부터 ‘데이트 집착 화성인’으로 찍혔다. 그의 정체는 회사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식습관’ 때문에 드러났다.

정 대리는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는 대신 사무실에 남아 있는 과자나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주말에 소개팅에서 돈을 쓰려면 점심값부터 아껴야 한다”는 것이 이유. 주중에는 동료들과 밥도 안 먹는 ‘궁상남’이지만 주말에는 함께 데이트하는 여성들에게 돈을 펑펑 쓰는 ‘간지남’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개성이라고 하기엔

박 대리는 관절을 움직여 다양한 동작을 표현할 수 있는 모형 장난감인 피규어 모으기가 취미다. 그래서 그의 사무실 책상엔 각종 피규어들이 가득하다. 기획팀으로 처음 옮겨온 지난해만 해도 5개 정도였지만 점점 늘어 지금은 책상 위 서류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다.

박 대리는 “하루의 3분의 1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는데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을 보지 못해 속이 타 생각해낸 책상 인테리어”라고 뿌듯해했다.

하지만 팀 동료들은 박 대리 자리를 지나다 자칫 한 ‘아이’라도 떨어뜨리는 실수를 할까봐 조심 또 조심한다. 피규어 중 수십만원에 이르는 비싼 것이 떨어지거나 흠이라도 생기면 박 대리가 기겁을 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회사를 놀러다니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어 속만 끓인다.

광고기획사에서 일하는 한 과장은 사내에서 별명이 닭벼슬이다. 짧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모두 하늘 위로 세우다보니 머리 크기가 얼굴 크기와 비슷할 정도다. 튀는 머리 때문에 사내는 물론 주변 직장인들까지 알아보는 유명인이다.

비교적 복장과 헤어스타일에 관대한 광고회사이지만 그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에 못마땅해하는 간부들 역시 적지 않다. 평직원들 가운데서도 헤어왁스를 발라 떡 진 머리에 먼지가 붙어 지저분해 보인다는 뒷말이 나온다.

그러나 과감한 헤어스타일과는 달리 과묵한 성격과 꼼꼼함으로 일로는 신임받고 있다. 직원들도 이젠 “길에서 마주치면 멀리 돌아갈 정도였지만 자주 보다보니 나름 정감이 간다”고 입을 모은다.

게임회사에 다니는 박모씨는 엉뚱한 질문으로 상사를 당황스럽게 하다 못해 괴롭게 한다. 입사 1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는 상사에게 물었다. “고양이가 혼자 있어 외로워하는데 사무실에 데려오면 안 될까요?”

한번은 애교로 봐줬지만 문제는 잊혀질 만하면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는 것. 이제 열 올리기에도 지친 부장은 고양이 얘기가 나오면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하게 “응, 안돼”라고 답한다.

그는 지난해 가을 회사 체육대회에서는 가로 줄무늬로 나온 회사 유니폼을 세로 줄무늬로 바꾸면 안되겠냐고 진지하게 건의하기도 했다. 부장은 어이가 없어 “그게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체육대회 당일 부장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혼자 세로줄무늬 유니폼을 따로 만들어 입고 체육대회에 나온 박씨 때문이다.

윤정현/고경봉/노경목/강영연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