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정치, 먹고 사는 길을 말하라
설 연휴 기간 정치인들이 살핀 민심의 찬바람이 어느 정도인지는 다들 확인했을 것이다. 도시와 농촌, 영남과 호남, 세대의 노소(老少)와 빈부 계층 가릴 것 없어 보인다. 코앞의 4월 국회의원 총선, 그리고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돌아선 민심의 절박한 위기감에 식은 땀을 흘린 국회의원님들 어디 한둘이겠는가.

한나라당은 지리멸렬이고 민주통합당의 기세는 등등하다. 난파선의 모습 그대로인 한나라당은 오래 전 바닥으로 가라앉았는데도 눈감고 있다가 이제서야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비장한(?) 쇄신을 내세우고 있다. 모든 걸 뜯어고치겠다며 공천혁명을 내세우고 간판까지 바꿔달겠다지만 한참 늦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탈당 요구까지 나왔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되풀이된 현직 대통령의 임기 말 당적 이탈은 우리 헌정사의 악습이다. 여당이 정권의 책임에서 모면해 보겠다는 ‘꼬리자르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닐 뿐더러 탈출구로서의 의미도 별로 없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을 여당이 쫓아냈지만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다. 나부터 살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내부투쟁만 격화되는 것이 앞으로 전개될 한나라당의 상황일 것이다.

그러니 총선은 필패(必敗)일 것이고, 연말 대선은 말하기조차 버겁다. 더구나 안철수 교수는 폭풍의 핵이다. 그는 아직도 스스로 정치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정치판의 중심 인물이다. 단 한번도 대선에 나서겠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국민들에게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다. 기성 정치에 대한 냉소와 반감의 산물이다.

민주통합당은 옛 민주당과 진보 시민단체, 한국노총을 합쳐 몸집불리기에 성공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실패가 불과 몇 년 전 폐족(廢族)을 자처했던 노무현 세력을 화려하게 되살렸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세운 통합진보당도 어울려 4월 총선에서의 연합구도로 움직이고 있다. 반(反) 이명박 표심의 산술적 덧셈을 기대한 좌파가 하나로 뭉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벌써 정권을 되찾은 것처럼 거침이 없다. 부활한 노무현 세력은 이명박 정권의 모든 가치와 정책의 틀을 일단 갈아엎고 보자는 파괴의 목소리부터 높인다. 한 맺힌 적개심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재벌 해체를 공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장경제·선진화·법치 등 대한민국이 추구해온 보편적인 가치마저 흔들고 왜곡시키는 데까지 나가고 있다. 하지만 파괴 이후의 국가 건설, 한·미 동맹이 와해된 뒤 북의 핵 위협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안보, 개방을 포기하고 재벌을 깨부순 후 한국 경제의 진로에 대한 통찰이 보이지 않는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고, 과거와 현재를 뒤바꾸자는 얘기만 있을 뿐이다.

정권을 바꾸는 동력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이 아니다. 2007년 말의 반(反) 노무현은 그가 깨뜨리려 애썼지만 오히려 경제·사회 양극화의 모순구조는 심화되고,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다짐했던 서민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쉽게 일자리를 구하고, 열심히 일해 돈을 모을 수 있는’ 희망이 이명박을 통해 투영됐고 그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이유였다. 이제 그것도 헛꿈이었던 걸 절감한 국민들은 다시 정권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통해 만들어질 새로운 체제, 더 나은 나라를 위한 시대정신 또한 결국 ‘먹고 살 만한 사회 건설’이다. 경제와 민생이 나라 경영의 근본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식(食)과 나라 안보를 튼튼히 하는 병(兵)의 족함’은 2500여년 전 공자(孔子)가 말한 정치의 원칙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다급한 과제 또한 괜찮은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성장을 어떻게 추구하고, 직장에서 떠밀려 나오는 베이비부머들의 빈곤추락을 무엇으로 막을 것인지, 김정은 체제 북한의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다. 그런데도 역사를, 나라를 거꾸로 되돌리자고만 할 뿐 누구도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논설위원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