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차키스를 투쟁과 영혼의 작가로 만든 아버지의 '남성적 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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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 세계명문가의 위대한 유산
그곳이 고향인 증조할아버지는 해적이 되어 크레타 연안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향료를 가득 실은 범선을 덮쳤다. 할아버지는 터키가 크레타를 침입하자 무기를 들고 싸웠지만 결국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 이웃의 존경을 받았고 ‘미할리스 대장님’으로 불렸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낙소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크레타로 돌아가 터키 군과 싸웠다.
저녁을 먹은 후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달이 떴고, 온 세상이 향기롭고 고요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걷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과수원에서 산책을 하는 동안 동료 기독교인들이 죽어가도록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니까 난 그곳으로 가겠다. 난 밤마다 할아버지를 꿈속에서 보는데, 줄곧 나한테 꾸중을 하시지. 난 가야 해. 하지만 그동안 넌 조금도 시간을 낭비해선 안 돼. 난 네가 참된 남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어 아버지는 “참된 인간은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두려움을 정복하지. 난 너를 믿는다”고 다그치듯 말했다. “아니, 난 너를 믿는 것이 아니라 네 핏줄 속에서 흐르는 크레타의 피를 믿겠어.”
아버지는 아들을 섬에서 유일한 학교인 프랑스학교에 입학시키고 크레타로 떠났다. “크레타가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라. 그걸 네 목표로 삼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교육은 때려치워!”
아들은 학교에서 점차 세상은 그리스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됐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크레타인만의 특질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마음에서 크레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화약으로 변색된 종이에 간략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왔다.
“터키 놈들과 싸우며 난 할 바를 다하고 있단다. 너도 싸워야 하니 꿋꿋하게 버티면서 크레타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네 머리는 네가 아니라 크레타의 소유야. 언젠가는 크레타를 해방시키기 위해 써야 하니까 잘 가꾸도록 해라. 무기로 돕지는 못하더라도 넌 머리로 도울 능력은 갖추었겠지? 머리도 역시 총이야. 나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지 마라!”(‘영혼의 자서전’에서)
이 편지를 받은 아들은 크레타 전체를 어깨에 걸머진 기분이 들었다. 혹시 배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시험에서 일등을 하지 못하면 크레타가 수치스러워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들에게는 이제 어린아이다운 태평함이나 천진함이 없었다.
훗날 크레타를 떠난 아들은 크레타의 흙 한줌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방황의 시절이나 벅찬 고뇌의 순간에도 그 흙을 꼭 쥐며 큰 힘을 얻었고 마침내 그리스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그가 곧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선조와 아버지에게 얻은 이런 경험으로부터 자유와 영혼을 노래하는 작품들을 썼다. 해적의 선조를 둔 아들은 그 야성을 무장 독립투쟁에 쏟아 부었고, 또 그 아들을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그리는 작가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영혼들의 위대한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