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실패 예견됐던 약가정책
“정부는 약가정책을 쏟아내기 바쁘다.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다. 아직도 정책이 시장을 일방적으로 이끌고 간다고 생각하다니 한심한 사람들이다.”

얼마 전 만난 한 제약사 최고경영자(CEO)는 정부 약가정책에 대해 이같이 불만을 터뜨렸다. “시대착오적 행정에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고도 했다. 요즘 제약업계 종사자들을 만나보면 정부 정책에 대한 원성이 심상치 않다. 왜 그럴까.

정부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제약업계의 비판이다. 정부는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1년 동안 의약품 ‘시장형 실거래가제도’ 운영을 유예한다고 확정했다. 시장형 실거래가제도는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약가에 낀 거품을 빼겠다며 병원이나 약국이 제약사로부터 약을 싸게 사면 차액의 70%를 인센티브로 주던 제도다. 현실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반대가 많았지만, 정부가 밀어붙여 2010년 10월부터 시행됐다.

제도 시행 후 대형 병원들은 의약품 낙찰 시 가장 저가를 써낸 제약사의 의약품을 구매했다. 그 결과 전국의 대형병원에서 단돈 1원에 낙찰받는 사례가 수백건이나 쏟아졌다. 유명 대형 병원에 납품하지 않고선 브랜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인지라, 제약사와 도매업체는 ‘울며 겨자먹기’로 병원 입찰가로 1원을 써내야 했다. 기형적인 저가 구매의 혜택은 고스란히 대형 병원들에 돌아갔다. 저가에 낙찰받고 원가의 70%에 달하는 금액을 다시 정부로부터 인센티브로 받았다. 대형 병원이 가져간 인센티브 금액은 지난 한 해 800억원가량이나 된다. 하지만 2010년 8월 취임한 진수희 전 복지부 장관이 더 센 약가정책을 써야 한다면서 약가 일괄인하를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일괄인하의 폭이 워낙 커서 시장형 실거래가로 인한 약가 인하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1년 앞을 내다보지 못한 정책 집행이 낳은 결과였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임채민 복지부 장관은 첫 기자간담회에서 “약가정책이 장관이 바뀔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이 말에 대한 해석이 구구했다. 손건익 복지부 차관은 18일 한 조찬 특강에서 “약가 인하를 철저하고 더욱 잔인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업계의 한 CEO는 “소는 없는데 외양간에 못질하는 행정 아니냐”고 토로했다.

이준혁 중기과학부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