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실직의 역설
정 대리(정형돈)는 동기 박 대리와의 승진 경쟁에서 진다. 박 대리는 소문난 아부파. 사표를 썼던 정 대리는 임신한 아내와 곤히 잠든 아이를 보고 찢어버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박과장님이라 부르지만 속은 문드러진다. 지난해 방송된 tvN의 ‘남녀탐구생활 라이벌 편’이다.

허구지만 실제 직장인 대다수가 겪는 일이다. 지난 연말 발생한 대전 경찰청장 컴퓨터 해킹 사건만 해도 실은 동기와 후배가 먼저 승진한 뒤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경찰대 출신 경정이 저지른 짓으로 드러났다. 터무니없는 범죄지만 남의 일같지 않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승진’도 언제까지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책임과 부담은 커지고 계속해서 올라가지 못하면 봉급쟁이로서의 명(命)만 단축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러니 많은 직장인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어떻게든 이겨 이것저것 움켜쥐고 싶다는 마음과 이제 그만 줄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직장에서의 생존과 승진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신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국내 직장인 80% 이상이 만성위염에 시달린다는 가운데 실직자가 늘면 사망률이 줄고, 실업률이 낮을 때 자살이 증가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경제학부 이철희 교수와 김태훈 씨(박사과정)가 1991~2009년 한국의 실업률과 사망률의 관계를 조사했더니 음(陰)의 관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특히 중년 남성의 경우 실업률이 낮을 때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 위험이 높았다는 발표다. 잘 살아 보자고 애쓰다 오히려 죽을 병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는 얘기다. 승진하면 스트레스는 10% 증가하는데 병원 갈 시간은 20% 줄어 건강이 악화되기 쉽다(영국 워릭대 연구진)는 보고와 맥락을 같이하는 셈이다.

인사(人事) 철이다. 승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졸지에 직장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장은 당혹감과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그러나 평생직장은 어디에도 없다. 황망한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참고 삭히고 견뎌야 했던 고통으로부터 놓여날 수도 있다.

어쩌면 생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스스로를 들볶던 나날에서 해방돼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하면서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의 행복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을 가다듬고 ‘쫓겨났다’가 아니라 ‘자유인이 됐다’는 식의 발상전환을 해볼 일이다. 더 오래 산다지 않는가.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