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어처구니'의 추억
다음주면 설이다.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을 생각에 곳곳에서 설렘이 감돈다. 내 고향 김해는 소박한 서까래와 처마, 그리고 흙담들이 종기종기 어우러진 작은 시골이었다. 지금은 키 높은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흙먼지 풀풀 날리던 시골 길이 매끈한 포장도로로 변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고향인지라 지금도 김해에 가면 정겹고 구수한 시골마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어릴 적부터 고향집에는 곰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맷돌이 있었다. 요즈음은 집안을 꾸미는 소품이나 골동품 가게에서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됐지만 당시에는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흔한 맷돌이었다. 우리집은 설이 되면 이 맷돌을 이용해 항상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고는 했다. 김해 지천에 메밀밭이 있어 메밀이 흔했기 때문이었는데, 나에게 메밀은 향긋한 맛 외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길게 쭉쭉 뻗은 메밀밭은 우리가 숨바꼭질하면서 놀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메밀은 거칠고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라 마을 어귀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물이었다. 그렇기에 예부터 흉년이 들면 허기를 채우기 위한 구황작물로 많이 사용됐는데, 하얀 메밀가루에 약간의 소금과 물을 넣어 반죽한 후 국수틀에 넣고 국수를 빼어 찬물에 헹궈 만든 메밀국수를 떠올리면 아직도 입가에 침이 고일 정도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동치미국물에 만 다음 얼음이 살짝 언 김장김치와 함께 먹을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다양한 즐거움을 주던 우리집 맷돌에는 숨은 비밀이 있다. 바로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인 어처구니에 얽힌 비밀이다. 철없던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내가 하루는 자치기를 하기 위해 나무를 찾던 중 맷돌에 달린 어처구니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톱으로 뎅겅 동강내서 자치기의 말로 사용했다. 그날 저녁, 문 앞부터 “엄마 밥 줘”라고 외치면서 어머니를 찾았다. 그때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맷돌에 메밀을 넣으시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상태로 맨손으로 맷돌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씻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맨손으로 맷돌을 돌리다 보니 어머니의 손은 터져 있었다. 나의 배고픔을 알기에 어머니는 어처구니 없이 맨손으로 맷돌을 돌리신 것이다. 그날 저녁 때 해주셨던 메밀국수를 숨도 쉬지 않고 들이마셨던 기억이 있다. 새벽에 나는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서 자치기로 사용한 어처구니를 작아지긴 했지만 다시 원래 자리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나를 보고 밝게 “어처구니가 어처구니없이 돌아왔네”라고 말하며 웃으셨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많은 추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메밀을 갈 때 사용한 고향집에 있는 맷돌 어처구니의 비밀만큼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설 때마다 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창식 < 동아원 사장 rhecs@kodoc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