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원준 SAP코리아 사장 인터뷰] "통찰과 실행으로 기업 서열 바꾸는 역할 하죠"


사장실은 직원 휴게실로, 매주 직원에 편지…스킨십 경영 강화
기업에 통찰력과 실행력 제공, 성장 프로세스 만들어 주고 싶어


"사장실이 뭐가 필요해요? 그걸 없애고 대신 방짝(룸메이트) 20명을 얻었죠."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계의 선도 업체인 SAP코리아 형원준 사장(49)에게는 번듯한 사장실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던 걸 없앴다.

올 초 기존에 있던 사장실을 직원들이 즐기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고 자신은 임원들과 2인 1조로 짝을 이뤄 방을 나눠 쓰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파트너를 바꿔 지금까지 20여명의 임원들과 모두 방짝을 맺었다.

최근 서울 도곡동에 위치한 SAP코리아 본사 '휴게실'에서 만난 형 사장은 사장실을 없애니 얻은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 회사에 온지 3년이 지났지만 직원들과 업무외의 깊은 속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죠. 방을 같이 쓰게 되면서 개인사, 고민 등을 주고받으며 가족애보다 진한 동료애가 생겼습니다."

그는 매주 전 직원에게 장문의 편지도 보낸다. 회사 비전을 공유하고, 직원들의 성과와 개선점 등을 솔직하게 쓰고 있다.

사장의 편지에 직원들 역시 자신의 의견을 담아 답장을 보낸다. 형 사장은 사원들의 의견을 경영에 반영하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SNS)를 활용한 사내 소통도 확대했다.

수천 억 건 데이터 단 몇 초에 분석…인메모리 컴퓨팅 선봬

이처럼 직원들과의 스킨십을 넓히고 있는 것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꾸기 위한 밑바탕을 만들기 위해서다. 형 사장은 2008년 8월 취임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SAP코리아의 비즈니스를 전사적자원관리(ERP) 이외 부분으로 확대하겠다" 며 "특히 비즈니스 애널리틱스&테크놀로지(BA&T) 영역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SAP는 ERP를 바탕으로 성장한 회사다. 하지만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 ERP 외 영역으로 사업을 넓혀가던 것과 달리 형 사장이 부임했을 당시 한국에선 여전히 ERP 매출이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업들이 SAP코리아를 떠올릴 때 단순히 ERP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벤더가 아닌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해주고 성장 프로세스를 만들어주는 곳으로 생각하길 바랍니다."

기업에 이런 혁신을 주려면 SAP코리아 직원들이 먼저 전문성을 지닌 고부가 가치 인력이 돼야 한다고 형 사장은 판단했다.
[형원준 SAP코리아 사장 인터뷰] "통찰과 실행으로 기업 서열 바꾸는 역할 하죠"
사장이 나서 직원들과의 소통을 넓히고 스킨십 경영에 나선다면 자율적, 창의적인 조직문화가 싹트고 우수한 인재들이 몰릴 것이라 생각했다.

형 사장은 이와 함께 BA&T 경영을 가능케하는 '인메모리 컴퓨팅'을 바탕으로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인메모리 컴퓨팅은 SAP 한국 연구개발(R&D)센터의 한국인 100여 명이 중심이 돼 전세계 개발자들과 5년 동안 개발한 기술이다

방대한 양의 거래 데이터를 서버의 메인 메모리에 보관하고 실시간 분석해 기업 경영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를 빠른 시간에 얻도록 해준다.

기존 디스크 기반 모델에 비해 대량의 데이터 이동과 상호 비교, 갱신 등을 몇 초 만에 해낼 수 있어 기업 생산성 향상에 획기적 변화를 줄 수 있다.

SAP 비샬 시카 최고기술책임자(CTO)는 "한국 연구진이 비즈니스 소프트웨어의 새 패러다임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유지 제품을 주력으로 생산하는 한 다국적 기업은 인메모리 컴퓨팅 기술을 통해 세계 각지의 유통점, 대형 할인점의 매출, 재고 현황을 분석해 4600억 건의 데이터 기록을 1초 만에 찾을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체 사업 분석을 진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급작스런 매장재고 부족 사태를 해소하고, 제품 보충 시간은 5일에서 2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에 따르면 기업의 약 30% 정도가 향후 5년 내 사내 핵심 애플리케이션의 한 개 이상을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로 운영할 예정이다. 2014년경이면 분석용 애플리케이션의 30%가 확장성과 연산 속도 향상을 위해 인메모리 컴퓨팅 기능을 활용할 전망이다.

성장 솔루션ㆍ컨설팅 통해 SAP직원들 '선생님' 호칭 듣기 원해

"소비자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이해하고, 이에 근거해 경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거죠. 소비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통찰력을 만들어내고, 실행에 옮기도록 돕는 것이 바로 SAP코리아의 역할입니다. 기업의 서열 순위를 바꾸는 건 바로 이같은 통찰력과 실행력이죠."

작년 시범적용을 거쳐 올해부터 인메모리 컴퓨팅을 도입하는 한국 기업들이 늘고 있다. 소비재 기업에서 의료까지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고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솔루션과 컨설팅을 통해 기업이 트랜스포메이션 하도록 돕는데 있습니다. SAP코리아 직원들이 파트너사에서 ‘선생님’으로 불리게 될 날이 올겁니다."

고려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형 사장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삼성전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8년부터 10년간 삼성전자 경영혁신본부에서 일하며 당시 SAP의 주력 제품인 ERP를 국내 최초로 삼성전자에 도입한 것도 바로 그다.

1999년 삼성벤처투자가 설립되면서 갑작스레 발령을 받았지만 팔자에도 없는 '창업투자' 역할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삼성맨의 타이틀을 벗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세계적 공급망관리(SCM) 솔루션 업체인 i2테크놀로지에서 연락이 왔다.

"왜 삼성의 성공만을 돕느냐. 한국의 많은 기업들에 이를 나눠주는 역할을 해보라"는 꼬임(?)에 넘어가 결국 삼성을 떠났다. 8년간 부사장, 사장으로 재임하며 1%에 불과하던 한국시장 점유율을 7%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2008년 이곳을 떠나 SAP코리아 사장을 맡게 됐을 때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단다. "15년 전 삼성전자에 ERP를 도입해 경영시스템을 글로벌화 시킨 때부터 이미 저와 SAP의 인연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형 사장이 SAP코리아를 맡은 이후 BA&T 솔루션 사업을 활성화시키면서 회사 매출은 두배 이상 증가했다. 지난 3분기 실적 성장률은 76%에 달한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