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장마당 닫혀 쌀값 폭등…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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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체제, 향후 북한 전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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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기간에는 ‘장마당’도 열리지 않아 지금 쌀값이 30%나 폭등했어요.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 못하지만 죽어서도 괴롭히고 있다고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에요.”

북한 인민군 중대장을 지내다 1997년 이후 세 차례 탈북을 시도해 2003년에야 한국에 정착한 김춘애 씨(가명·57)는 21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 북한의 지인들과 통화해 들은 얘기를 이렇게 전했다. 김씨는 1997년과 1999년, 2000년 세 차례 목숨을 건 탈북을 시도했다. 그중 두 번은 중국에서 강제 북송당해 노동단련대에 갇혀 지내며 처형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19일 오후 북한에 거주 중인 친구들과 통화했다는 김씨는 “현지 분위기가 매우 삼엄해 애도 기간에는 통화가 불가능하다”고 아쉬워했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김씨를 만나 김정일 사망 소식 발표 직후 북한 현지 분위기를 들어봤다.

▶김정일 사망 후 북한에 있는 지인들에게 전해들은 분위기는 어떤가.

“사망 소식 발표 직후 잠깐 북한 지인들과 통화했다. 19일부터 집 안에서건 밖에서건 5명 이상 모이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왔다더라. 술을 마시는 것도 금지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 사망 때도 그랬던 기억이 있다. 애도 기간에는 시장 운영도 못하게 한다. 식량을 구할 데가 없어 쌀값이 갑자기 엄청 뛰었다고 한숨을 쉬더라. 1㎏에 북한 돈으로 3800원이던 쌀값이 김정일 사망 후 5000원으로 뛰었다. 시장에서 갑자기 물건을 살 수 없으니 알음알음 암거래로 사먹느라 그렇다. 애도 기간에는 통화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보통 한 달에 한 번은 20~30분씩 통화했는데, 김정일 사망 직후에는 겨우 1~2분씩 조심스레 통화한 뒤로 지금은 엄두도 못낸다.”

▶애도 기간 중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북한 주민의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닐 것 같은데.

“북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얘기 중 ‘죽으려면 땅 얼기 전에, 그게 안 되면 땅 녹고 진달래꽃 필 때 죽어라’는 얘기가 있다. 겨울이면 땅이 꽁꽁 얼어 파기도 힘들고, 꽃을 구하기도 어렵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고 나서 ‘북한 주민들 꽃 구하려면 고생 많이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김 주석 사망 때는 매달 8일(김일성 사망일은 1994년 7월8일), 사망 후 100일, 200일, 석 달 이런 식으로 계속 꽃다발을 바쳐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꽃을 못 가지고 가면 선생님에게 비판받고 울고 오곤 했다. 겨울철 평양 시내에는 진달래꽃이 많지 않았다. 나중에는 멀리까지 가 진달래꽃 줄기를 꺾어다 비닐을 씌우고 이불을 씌워 꽃을 피워서 아이들 손에 쥐어 보냈다. 당시 꽃 때문에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김일성이 죽어서도 사람들을 끝까지 고생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도 분위기는 김 주석 사망 때와 비교해서 어떤가.

“김일성 사망 땐 진심으로 슬퍼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그땐 배불리는 못 먹었어도 굶어죽지는 않았다. 1995년에 배급이 끊긴 후 아사하는 사람이 넘쳐났다. 탈북하기 전엔 먹을 것이 없어 쥐를 잡아서 털을 벗겨 통째로 먹는 사람도 봤다. 경제적 상황이 워낙 좋지 않은 데다 일상적 통제도 심해져 겉으로는 애도하고 눈물을 흘려도 속으로는 좋아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암암리에 한국문화 등 외부소식을 접하기가 수월하다는데, 북한주민의 동요는 없나.

“북에 있는 친구 딸 중 한 명은 나보다 한국드라마를 더 많이 본다. 옛날에는 CD로 구워 몰래 샀다는데, 요즘에는 북한 돈 4만원이면 20부작짜리 드라마가 들어있는 작은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를 빌릴 수 있다. 밤에는 문 잠그고 한국방송도 듣는다. 주파수를 조절하면 한국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 드라마 등을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한 사람들이 꽤 있어 현재 북한 체제에 대한 반발도 내심 많을 것이다.”

▶실제 북한 경제상황은 어느 정도인가.

“지방사람들은 배급 음식이 전혀 없다. 1980년 함경북도 무산에 김 전 주석이 아파트를 많이 건설했었다. 무산 광산 사람들에게 선물한다면서. 1997년 탈북할 때 그 아파트를 지나쳤는데 문도 너덜너덜하고 사람 흔적이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기차에서 옆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물어 보니 ‘평양에서 왔냐’고 내게 질문한 후 ‘다 굶어죽지 않았으면 중국으로 도망쳤다’고 하더라. 최근에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첫 마디가 ‘익지 않은 고기 먹지 말라’고 했다. 무슨 얘긴가 싶었는데 조카딸이 군에 갔다가 익지 않은 고기를 먹고 기생충이 핏줄을 따라 옮겨다니는 병에 걸렸다더라. 사람 먹을 것도 없으니 소, 돼지에겐 인분 같은 것밖에 못 먹여 기생충이 들끓는다.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한다고 하기에 지난 10월에 돈을 부쳐줬다. 한국 은행계좌를 가지고 있는 중국인을 통하면 30% 수수료를 내고 돈을 전달할 수 있다. 이곳에선 가축들도 검증된 사료만 먹고 큰다고 하니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 이런 와중에 강성대국 건설이라니, 정말 허황된 소리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