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롤스로이스가 인정한 단 하나의 경쟁자
세계 최고의 명차로 알려진 롤스로이스. 얼마 전 이 회사의 댄 발머 아시아·태평양 지역 마케팅 매니저에게 경쟁상대가 누구냐고 묻자 “롤스로이스의 경쟁자는 고급 요트와 별장, 최고급 시계”라고 답했다. 이때 자동차 브랜드는 단 한 곳만 언급했다. 바로 영국의 ‘벤틀리’다.

벤틀리 역시 “롤스로이스 외에는 경쟁자가 없다”고 말한다. 두 회사는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마이바흐와 함께 세계 3대 명차로 꼽힌다.

벤틀리는 “우리는 다른 이들이 멈춘 곳에서 시작한다(We start where others stop)”는 경영철학에서 알 수 있듯이 수작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영국 크루 공장에서 근무하는 장인들은 한 대의 벤틀리를 완성하는 것을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고 표현한다.

벤틀리의 플래그십 모델인 ‘뮬산’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300시간이다. 이 중 인테리어 작업에만 170시간이 쓰인다.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를 가정하면, 한 대의 뮬산이 완성되기 위해선 인테리어에 4주를 포함해 총 7주가 넘는 시간이 걸린다.

벤틀리의 제작방식은 철저히 ‘코치빌더’의 전통을 따른다. 코치빌더는 수작업을 통해 귀족들을 위한 고급 마차를 주문 생산하던 장인들을 부르는 말이다. 벤틀리의 모든 엔진에는 고유 번호와 함께 엔진 제작에 참여한 엔지니어의 서명이 담겨져 있다. 벤틀리는 또 특유한 향을 내기 위해 가죽을 특수 태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객이 ‘세상에 한 대뿐인 벤틀리’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롤스로이스와 닮았다. 지난해 11월부터 주문을 받기 시작한 뮬산의 경우 외관 페인트 색상은 총 114가지이며 인테리어에 사용되는 가죽 색상은 24가지, 베니어 색상은 9가지다. 카펫도 21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이 밖에 고객이 원하는 컬러 및 재질을 별도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범위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다.

이탈리아의 한 유명 디자이너가 평소 사용하는 형광색 펜 색상을 요구했을 때 벤틀리의 장인들이 이 색상을 재현해 낸 일화는 유명하다.

벤틀리의 역사는 1912년 월터 오웬 벤틀리가 동생 호레이스 밀너 벤틀리와 함께 ‘벤틀리 모터스’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내년이면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설립 초기에는 자체 제작 차량이 아닌 프랑스 ‘DFP’사의 모델을 수입해 판매했다. 속도광이었던 월터 벤틀리가 DFP 엔진을 직접 튜닝해 애스톤 클린튼 언덕 경주에 참여했고 해당 클래스의 기록을 깨버렸다. 이것이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의 계기가 됐다.

이후 1919년 벤틀리가 내놓은 첫 모델인 ‘3리터’는 당시 자동차 경주에서 선두권을 달리던 프랑스의 부가티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스포츠카 드라이버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이 모델은 직렬 4기통에 배기량은 2996㏄였으며 한 개의 실린더에 밸브 4개가 적용된 ‘4밸브 타입’이었다. 또 실린더 하나에 두 개의 점화플러그가 처음 적용된 엔진이기도 했다. 최고출력은 70마력이며 시속 129㎞까지 달렸다.

특히 벤틀리는 24시간 동안 서킷을 가장 많이 달린 자동차가 우승하는 경기인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명성을 쌓았다. 3리터는 1924년,1927년에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뒤이어 출시된 ‘4.5리터’가 이듬해에 우승행진을 이어갔다. 이후 1929년에는 ‘6.5리터’의 스포츠버전인 ‘스피드 식스’, 1930년 6.5리터가 우승하는 등 4년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창업주인 월터 벤틀리는 항상 “좋은 차, 빠른 차, 최고의 차(Good car, Fast car, Best car)”를 강조했다. 럭셔리하면서도 우수한 성능을 가진 빠른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틀리 ‘컨티넨탈 플라잉스퍼 스피드’의 경우 트윈 터보 12기통 엔진을 장착해 최고 출력이 600마력에 달한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8초, 최고 속도는 322㎞/h다.

승승장구하던 벤틀리는 1929년 10월24일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결국 경영난에 빠진 벤틀리는 경쟁자인 롤스로이스에 인수됐다. 하지만 벤틀리는 1950년 세계에서 가장 빠른 4인승 모델이었던 ‘R타입 컨티넨탈’과 1956년 후속모델 ‘S1 컨티넨탈’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색깔을 지켰다.

1998년까지 한솥밥을 먹던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롤스로이스가 경영난에 빠지면서 각각 BMW, 폭스바겐으로 인수됐다.

이후 2006년 출시된 ‘컨티넨탈 플라잉스퍼’와 ‘컨티넨탈 GT’로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지난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공개된 4인승 ‘뉴 컨티넨탈 GTC’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컨버터블”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진석 기자 isk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