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sure&] 시리도록 푸른 바다 그리고 억새…등대 오르니 저멀리 한라산이
가을의 남하 속도는 빠르다. 북풍이 쫓아오기라도 하는 걸까. 단풍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한반도의 남단까지 물들였다. 이제는 이 가을마저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그래서 아직 가을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남녘의 섬, 거문도로 향한다.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114.7㎞ 떨어진 거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다도해 최남단의 섬이다. 섬의 전체 면적은 12㎢. 물길이 험해 예부터 하늘이 도와야 갈 수 있는 섬으로 알려졌다. 옛 이름은 삼도·삼산도·거마도 등이었으나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오전 7시40분 전남 여수에서 쾌속선을 타자 2시간 만에 거문도에 닿는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고도 이렇게 3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3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 3.3㎢ 정도의 천연적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돼 있는 곳을 도내해라고 하는데,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 구실을 한다. 이런 입지 때문에 거문도항은 예부터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았다. 조선 말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영국기를 게양했던 거문도 사건도 그런 사례다.

거문도의 3개 섬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은 고도가 통상 거문도로 불리는 면소재지다. 외지인의 거문도 여행은 대개 이곳 고도리에서 시작한다. 여수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승선한 쾌속선 역시 고도리에서 하선한다. 고도리는 서도와 삼호교라는 다리로 연결돼 있으며 동도는 서도나 고도와 분리돼 종선을 이용해 오갈 수 있다.

고도리에서 서도로 이동한 다음 덕촌마을의 들머리를 거쳐 불탄봉으로 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서도 정상에 있는 불탄봉에 올라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고사목과 억새밭을 눈과 가슴에 담고 양편의 깎아지른 능선을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유인 등대인 거문도 등대까지 3~4시간가량의 트레킹 코스는 국내 어느 곳의 경관에도 뒤지지 않는 늦가을의 비경을 펼쳐 놓는다.

덕촌마을에서 불탄봉까지는 다소 가파른 산길을 따라 30분가량 오르게 되는데 코스가 그리 험하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올랐다. 불탄봉(195m)에 오르니 출발점인 고도와 서도, 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남방으로는 섬과 주변 해역 200m까지가 명승 제7호로 지정된 백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백도는 워낙 난바다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 해역의 물길이 거세 외지인이 발길을 들이기 어려운 곳이다. 3대가 덕을 쌓고 공을 들여야만 딱 하루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이 거문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질 정도다. 백도에선 천혜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350종 이상의 아열대 식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섬과 섬으로부터 200m까지 해역이 국가 명승 제7호로 지정돼 섬에 오르는 것은 철저히 금지돼 있고, 유람선을 타고 볼 수밖에 없다.

유람선은 고도리 선착장에서 오전·오후 기상 상황과 인원에 따라 수시로 운행하고 있으며 왕복 소요시간은 2시간30여분. 요금은 2만6000원이다.불탄봉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트레킹 거리는 7㎞, 4시간여가 소요된다. 일단 불탄봉에 오른 이후의 코스는 절벽 능선을 따라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비경을 보느라 힘들기는커녕 지루할 틈마저 없을 정도다.

섬 산의 정상에 펼쳐진 드넓은 억새 군락지를 보며 가을에 흠뻑 취해 본다. 절벽 끝에 불뚝 솟은 신선바위에 가슴 졸이며 올라 목청껏 대양을 향해 소리쳐 보기도 한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 거문도의 가장 대표적 나무인 동백나무 자연 군락지가 터널을 만들고 대낮인데도 하늘을 뒤덮어 어두컴컴할 정도의 숲길을 따라 내려가니 거문도 여행의 백미 거문도 등대로의 오솔길이 또다시 펼쳐져 있다. 늦겨울에 만개하는 동백꽃이지만 벌써 철을 잊은 동백꽃이 적잖이 피어 있어 선홍빛 동백꽃을 감상하는 행운도 누렸다.

얼마 전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거문도 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은 국내 두 번째의 등대로 1905년부터 점등해 100년이 훌쩍 넘도록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는 유인 등대다. 초창기의 시설은 현재 기능이 정지돼 전시 중이며 2006년 증축한 새 등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이 33m의 등대 꼭대기는 방문객 누구라도 오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 중이다. 이곳 전망대에서는 거문도와 백도를 조망할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제주의 한라산까지 보인다. 거문도=글·사진 여행작가 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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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팁


거문도는 거리상 당일여행은 어렵고 최소한 현지 1박 이상의 일정으로 가야 한다.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용산역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4시께 여수엑스포역에 도착, 여기서 3㎞쯤 떨어진 여수연안여객터미널 주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전 7시40분에 출발하는 쾌속선을 이용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쾌속선은 여수와 고흥 나로도선착장에서 탈 수 있으며 운임은 편도 3만6600원. 2시간20분 정도 걸린다. 여수 출발 쾌속선은 나로도와 손죽도, 초도를 거쳐 거문도에 도착한 뒤 동도, 서도, 고도에서 하선한다.

거문도에는 민박과 모텔급의 숙박업소가 꽤 많이 있다. 고도리의 선착장 인근에 횟집을 비롯한 음식점들이 많은데 10월 이후 거문도 근해에서 잡히는 갈치는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최고로 통한다. 갈치조림정식 1인분이 1만2000원인데 생물갈치여서 맛의 격이 다르다.

거문도=글·사진 여행작가 황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