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만개 화환 중 30%가 재탕…연 3000억 시장"
지난 16일 오전 11시,서울 한남동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3층. 고(故) 박귀태 씨(가명)의 장례가 끝나고 상주들이 장지로 떠나자 어디선가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 3명이 텅 빈 빈소 앞에 나타났다. 이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빈소에 있던 화환을 장례식장 후문에 대기해 놓은 흰색 1.5t 트럭으로 옮겨 싣기 시작했다.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트럭에는 이미 화환 10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박씨의 빈소에서 들고 나온 화환 10개도 그 옆에 놓여졌다.

화환을 가득 실은 트럭은 병원을 빠져나와 한남대교를 건너 곧바로 올림픽대로를 탔다. 30~40분을 내달린 트럭은 서울 오금동에 인적이 드문 화훼단지 앞에 멈춰섰다.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화원 직원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힌 리본을 제거하고 화환을 비닐하우스 안으로 옮겼다. 또 다른 직원은 화환에 물을 뿌려댔다. 작업이 끝나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화원 안은 장례식장에 쓰이는 근조(謹弔)화환과 국화 수백 송이로 가득했다. 손님을 가장해 기자가 "좀 급해서 화환을 직접 사러 왔다"고 하자 화원 관계자는 "(3단 화환을 가리키며) 이것은 10만원,국화가 좀 더 많은 것은 15만원"이라고 답했다. 두 개 모두 순천향대학병원에서 방금 가져온 화환이었다. "요즘 재사용하는 화환이 많다는데 괜찮냐"고 묻자 직원은 "우리는 그런 것들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기자와 동행한 S씨(36 · 화원 운영자)는 "폐기처분한다고 가져온 화환에 버젓이 물을 주는 건 (화환을) 버리기보다는 재활용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한 해 3000억원 시장 형성

서울 유명 대학병원 등 전국의 많은 장례식장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진 근조 화환이 발인 후 버젓이 '재탕'돼 전국 상가로 되돌아오고 있다. 상주들이 장지로 떠나기 무섭게 특정업체들이 수거한 뒤 조화제작업체에 넘겨지고 이곳에서 조화의 상태에 따라 시든 국화 몇 송이와 리본만 바꿔 달고 새 조화로 둔갑해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를 규제할 마땅한 법적 근거도 없는 상태다. 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대병원,충남대병원 등 일부 유명병원과 대학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파쇄기를 설치하거나 꽃을 직접 폐기해 이러한 불법유통을 막고는 있다.

S씨는 "이렇게 만들어진 화환은 정상가와 같은 10만~15만원 선에 거래된다"며 "보통 2차례에서 많게는 7차례까지 다시 사용된다"고 귀띔했다.

이애경 단국대 환경원예학과 교수의 최근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결혼식과 장례식 등에 사용되는 화환은 연간 700만개가량.이 가운데 20~30%(140만~210만개)가 재활용 화환이다. 애경사에 가장 많이 쓰이는 3단 화환의 가격은 10만~15만원 선.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한 해 1400억원에서 최고 3150억원의 재활용 화환시장이 형성되는 셈이다.

음성적인 조화재활용 시장의 형성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건 화훼 농가들이다. 꽃시장에서 화환으로 사용되는 물량은 전체 유통량의 60%에 육박한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화환 재활용으로 인한 화훼 농가의 생화 매출 피해액은 연간 550억원에 달한다.

서울에서 화원을 운영하는 김명기 씨(45)는 "재활용 업자들이 재활용 화환을 더 싼 가격에 장례식장에 공급해 가격경쟁에서도 밀려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피해를 입는 것은 재활용조화를 받는 쪽도 마찬가지다. 회사원 박은선 씨(29)는 "회사에서 한 달에 10번 정도 화환을 구입하는데 재탕된 화환인 걸 알았으면 안 샀을 것"이라며 "회사의 얼굴을 대신해 고객과 거래처에 화환을 보내는데 남이 썼던 시든 꽃을 누가 보내길 원하겠느냐"고 말했다.

◆3단 조화 5만원 이상 남겨

화환 재활용 업체들은 조직적으로 분담해 거래하는 형태다. 수거는 특정 전문업체가 맡는다. 장례식장 등에서 업체별로 1주에서 1년 단위로 계약,수거업자를 통해 수거된다. 수거 업체들은 주로 이용업체(장례식장 등)와 협의해 개당 8000~1만원에 수거 계약을 한다. 이는 다시 화환 제작업체에 1만5000원에서 2만원에 넘겨진다.

장례식장 등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3단 화환은 개당 10만원 정도에 거래된다. 정상 제품의 경우 받침대를 제작하는 데 1만5000원,꽃 3만원,리본과 배송비 등 기타 비용까지 합쳐 7만원에 제작된다. 그러나 재활용 화환은 시든 꽃을 바꿔 달기 위해 국화 몇 송이와 배송비 등을 합쳐 5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장례식장 관계자는 화환 재활용 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다. 홍영수 한국절화협회 사무국장은 "대부분의 장례식장은 서류상으로 화환을 폐기해줄 업체를 지정해주고,그 대가로 뒷돈을 받는다"며 "장례식장과 화환 재활용 업체만 이득을 보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유명 대학병원 장례식장,알고도 묵인

화환 재활용 사업이 돈이 되자 지난해 여름에는 조직 폭력배 10여명이 서울의 한 대학병원 로비에서 '화환 수거권'을 가져가기 위해 대치하는 일도 벌어졌다. 홍 사무국장은 "병원 측에선 화환을 폐기하려고 계약을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병원이 공공연하게 재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대병원,충남대병원 등 일부 자체 폐기하는 곳을 제외하고 유명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에서조차 이미 사용된 조화가 재활용된다는 걸 알면서도 묵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가 화환 재활용 사실을 확인한 순천향대학병원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순천향대학병원 관계자는 "두 개의 화환을 가져다 놓고 시든 꽃은 버리고 깨끗한 꽃은 다시 사용하려는 것"이라며 "살아있는 생생한 꽃을 버리긴 아까워 조금만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의 다른 관계자는 "(화환이) 재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받침대만 다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가 "다시 사용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되묻자 그는 "청소부 한 명이 장례식장에서 월급을 받지 않고 청소 등을 도와주는 대신 화환을 처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 "우리 병원이 관리하지 않아 재활용되는지는 모르겠다"고 책임을 떠넘겼다.

고려대병원도 조화를 수거업체들에 넘기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려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받침대만 재활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화환 재활용에 대해 농식품부와 한국절화협회,한국화원협회 측은 화환에 제작일자,화환 소유주 등의 정보를 담은 라벨을 부착해 재사용을 막는 '화환 실명제'를 해결 카드로 내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강제 규범이 없는 이 해결책이 얼마나 큰 실효성을 가질지 아직은 미지수"라며 "뚜렷한 법 규범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소비자와 화훼 농가들의 시름만 깊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우섭/이현일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