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흑선(黑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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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군함이 일본 에도만에 나타난 건 1853년 여름이었다. 선체를 타르로 검게 칠했기 때문에 흑선(黑船)으로 불렸다. 한 20대 일본 청년이 흑선을 둘러보고 충격을 받아 서양문물과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해외유학을 결심한다. 하지만 나가사키에서 러시아 군함에 올라 밀항하려다 실패하고,1854년 미 · 일화친조약 체결 후엔 흑선을 몰래 타고 미국으로 가려다 들켜 14개월간 옥살이까지 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꼽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가 투옥됐을 때 밀항 동기와 사상적 배경을 풀어 쓴 책이 '유수록(幽囚錄)'이다.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에 영향을 끼친 내용이 담겨 우리로선 꺼림칙하지만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을 알아야 한다'는 각오만은 대단했다. 요시다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고향에서 개화지도자들을 대거 길러냈다. '일본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서양에서 배우라'는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다. 서양의 직조술,대포제조술,조선술 등을 받아들인 건 물론 육군 군제까지 개편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에 성공한 일본은 지구촌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20세기 아시아의 상징이 됐으나 '잃어버린 20년'에 발목이 잡혔다. 더구나 올 3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큰 타격을 받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한 '제3의 흑선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메이지 유신이 제1의 흑선,패전 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개화가 제2의 흑선이었다면 이젠 TPP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한국이 EU,미국 등과 FTA를 맺으며 먼저 치고 나간 게 직접적 자극이 됐다.
일본은 요즘 일 · EU FTA 협상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 TPP까지 성사되면 한국의 FTA 선점효과는 희석돼 버린다. 이런 격변기에 야당은 생떼나 다름없는 꼬투리 잡기로 한 · 미 FTA 비준을 방해하고 있다. 여당도 소신 없이 눈치보기에 매달리고 있다. 국익이 정치적 계산에 볼모로 잡혀 있는 형국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준비할 때 우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쇄국으로 맞서다 국력을 소진하고 말았다. 지금도 나라간 생존 경쟁이 그때 못지않게 치열하다. 정치실패가 국익을 해치는 과오를 범해선 안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요시다가 투옥됐을 때 밀항 동기와 사상적 배경을 풀어 쓴 책이 '유수록(幽囚錄)'이다.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에 영향을 끼친 내용이 담겨 우리로선 꺼림칙하지만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을 알아야 한다'는 각오만은 대단했다. 요시다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고향에서 개화지도자들을 대거 길러냈다. '일본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서양에서 배우라'는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다. 서양의 직조술,대포제조술,조선술 등을 받아들인 건 물론 육군 군제까지 개편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에 성공한 일본은 지구촌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20세기 아시아의 상징이 됐으나 '잃어버린 20년'에 발목이 잡혔다. 더구나 올 3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큰 타격을 받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한 '제3의 흑선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메이지 유신이 제1의 흑선,패전 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개화가 제2의 흑선이었다면 이젠 TPP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한국이 EU,미국 등과 FTA를 맺으며 먼저 치고 나간 게 직접적 자극이 됐다.
일본은 요즘 일 · EU FTA 협상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 TPP까지 성사되면 한국의 FTA 선점효과는 희석돼 버린다. 이런 격변기에 야당은 생떼나 다름없는 꼬투리 잡기로 한 · 미 FTA 비준을 방해하고 있다. 여당도 소신 없이 눈치보기에 매달리고 있다. 국익이 정치적 계산에 볼모로 잡혀 있는 형국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준비할 때 우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쇄국으로 맞서다 국력을 소진하고 말았다. 지금도 나라간 생존 경쟁이 그때 못지않게 치열하다. 정치실패가 국익을 해치는 과오를 범해선 안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