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와 관련해 공은 이제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이명박 대통령이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에 대해 '선 비준 후 재협상' 카드를 제시하는 성의를 표했다.

적어도 한나라당에 단합할 수 있는 명분을 줬다. 당내 협상파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협상파는 청와대를 압박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새로운 제안을 민주당이 거부할 경우 한나라당이 강행처리에 나설 최소한의 명분을 쌓았다는 분석이다.

당장 한나라당은 민주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김기현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이번 ISD 재협상 제안은) 전진된 제안으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새로운 제안이고 민주당도 적극적으로 응해달라"고 요구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책임지고 재협상이 이뤄지게 하겠다. 믿어달라"고 한 점에 무게를 실었다.

강경파인 친이계 장제원 의원은 "야당이 대통령의 이 파격적인 제안마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반대를 위한 반대"라며 "내일 민주당 의원총회 결과를 지켜본 뒤 새로운 안이 부결되면 원내지도부에 지도력을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국 대통령이 한 말이기 때문에 무게가 실리지 않느냐"면서 "야당도 반대할 명분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쇄신파로 분류되는 홍정욱 의원도 "이제 공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면서 "우리가 재촉하기보다는 민주당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 의원과 김성곤 민주당 의원 등 한 · 미 FTA 여야 합의 처리를 추진하기 위한 여야 온건파 6인 협의체도 이날 모임을 갖고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여야 합의 처리를 위해 여야 8인이 촉구한 서명에 참여한 한나라당 의원은 현재까지 45명이다.

민주당은 일단 수용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지난달 31일 여야 원내대표가 가합의한 '선 비준,후 ISD 재협상'을 의원총회에서 이미 부결시켰던 만큼 이와 내용이 똑같은 이 대통령의 제안을 16일 의원총회에서 새롭게 논의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준 즉시 재협상에 임할 경우 물리력으로 저지하지 않는다'는 당내 절충파의 입장에도 못 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회담 직후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 당론에 변함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회동에 참석했던 김진표 원내대표도 "미흡하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 대통령의 새로운 제안마저 거절하는 데 따른 여론 역풍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지만 야권 연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민주당 지도부의 처지다.

당장 민주노동당 등이 "'선비준'안을 수용할 경우 모든 정책연대를 파기하겠다"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기존 당론을 변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다.

민주당이 기존 당론을 고수할 경우 한나라당은 '모든 양보를 내놨다'는 명분 아래 24일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FTA 처리 향배가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김형호 /도병욱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