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4사 前원사본부장…경쟁 넘어선 13년 우정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인근의 '명성이 자자한 국시집'.지난 14일 저녁 네 사람이 생선전과 문어 요리를 안주삼아 정다운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매달 한 번씩 꼭 이 자리에서 모임을 갖는다. 그렇게 하길 올해로 13년째.

배영호 코오롱인더스트리 사장,이대훈 LS네트웍스 부회장,섬유 무역업체인 스마트인터내셔날의 이광호 사장,이두호 전 선경합섬 전무가 멤버다. 이들은 학교 동문도,고향 친구도,동호회 회원도 아니다. 얼핏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 네 사람은 '적'으로 만나 '친구'가 된 묘한 '절친'의 케이스다.

섬유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 초반 이들은 국내 섬유업계 빅4의 핵심 보직인 원사사업본부장으로서 업계 모임인 화섬협회 회의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배 사장은 코오롱,이 부회장은 동국합섬,이 사장은 효성의 전신인 동양나일론,이 전 전무는 SK케미칼의 전신인 선경합섬을 대표해 협회 모임에 참석했다. 이들 4개사가 업계를 주도하던 터라 협회 회의가 있는 날이면 네 사람이 먼저 다방에서 만나 방향을 정하면 다들 따라오는 식이었다. 대관 업무도 맡고 있던 이들은 정부 주무부처인 상공부 섬유산업과장과도 자주 어울렸다. 당시 이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관료가 임래규 전 산업자원부 차관이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이라고 한들 경쟁사 관계인데,얼굴 붉힐 일도 없진 않았다. "거래처를 빼가는 일이 생기면 따지지 않을 수 없죠.'그래도 오래 본 사이인데,남의 마누라 데리고 남의 집 안방에서 블루스 추고 그럴래!'하면서요. "(이 부회장)

이들이 '절친'이 된 계기는 1998년 외환위기 때였다. 배 사장은 원사본부장 자리를 떠나 구미공장장으로 갔다가 코오롱유화 대표가 됐지만,나머지 세 사람은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이 사장과 이 전 전무는 명예퇴직을 했고,이 부회장이 몸담던 동국합섬은 워크아웃에 몰렸다. 구미에서 다시 서울로 온 배 사장의 주도로 과거 '원사 4인방'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마침 네 사람이 모두 도곡동 인근에 살고 있어 타워팰리스 부근의 중국집 '칭칭(請請)'에서 만났다. 그 자리는 지금 '명성이 자자한 국시집'이 됐고,네 사람은 이후 매달 한 번씩 13년째 똑같은 곳에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동종 업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면 담합 의혹도 받겠지만,서로 그 자리를 떠나니 더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된 셈이죠.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고,서로 도와줄 일이 있으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하면서 정이 들어가는 거죠."(배 사장)

네 사람이 모두 학연이나 지연에서 공통점은 없지만,두 사람씩은 닮은점을 갖고 있다. 이 부회장과 이 전 전무는 서울대 상대 동문이고,배 사장(서울대)과 이 사장(한양대)은 대학은 다르지만 섬유공학도다.

비록 이름은 없는 모임이지만 멤버들의 삶은 이후 순항했다. 배 사장은 코오롱그룹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이 됐으며 지난해 국내 최고 권위의 기업인상인 다산경영상을 수상했다. 이 부회장은 동국무역 부사장과 국제상사 사장을 거쳐 LS네트웍스 대표를 맡고 있고,대한사이클연맹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 사장은 섬유 무역업체를 차려 자리를 잡았으며,효성그룹의 전직 임원 골프대회에서 지난해와 올해 거푸 메달리스트에 올랐다.

이들은 이날 정치 경제 사회 가정사를 넘나들며 2시간여 얘기꽃을 피운 뒤,늘 그렇듯 다음달 모임 날짜와 오너(밥값 낼 순서)를 정하곤 자리를 파했다.

윤성민/윤정현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