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 발표 했는데…"어라! 가격표가 없네"
기아자동차 국내 마케팅팀과 재무팀 사이에 요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달 말 출시할 박스 모양의 경차 '레이'의 판매 가격을 놓고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재무팀은 "개발비와 함께 다양한 옵션을 기본 장착한 점을 감안하면 0000만원이상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케팅팀은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있어 가격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아차 관계자는 "레이 가격은 마케팅팀과 재무팀에서 최종 조율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다양한 요인을 반영해 신차발표회 때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1000cc 가솔린엔진이 장착되는 레이의 가격이 '모닝'보다 100만원 정도 비싼 1100만~1400만원 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점치고 있으나,현재로선 아무도 모른다. 기아차는 지난 11일 레이의 외장 디자인을 공개하면서 소비자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

경기침체로 자동차 소비심리가 오그라들자 자동차 업계가 신차 가격을 정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기 침체기에는 가격을 잘못 책정하면 초기 마케팅에 실패하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동차 업체들이 신모델을 출시하면서 가격을 '늑장 발표'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도요타는 지난 1일 경기 평택 국제자동차 부두에서 미국에서 들여온 미니밴 '시에나'의 론칭 발표회를 가졌다. 제원이나 성능 등 시에나의 모든 콘텐츠를 공개했다. 하지만 가격은 밝히지 않았다. '가격을 왜 공개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카바야시 히사오 한국도요타 사장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1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1주일뒤.한국도요타는 시에나 2.7LE 모델은 4290만원,3.5리미티드 모델은 4990만원으로 발표했다. 업계 예상보다 2.7LE는 200만원,3.5리미티드는 100만원가량 낮은 가격이었다.

르노삼성자동차는 지난 7월 중순 경남 남해 힐튼리조트에서 가진 '올 뉴 SM7' 신차발표회 때 "32개월간 4000여억원을 투입했다"면서도 가격은 아직 미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가격을 내놓았다.

소비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가격을 '최후의 날(판매시작 당일)'까지 미루고 또 미루는 이유는 뭘까.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신차 발표회 때 기술이나 성능이 가격효과에 묻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신모델의 성능에 포커스를 두기 위해 가격을 나중에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외장 디자인만 살짝 보여주고 제원과 성능을 나중에 공개하는 일종의 '티징(teasing)' 전략의 하나라는 얘기다.

업계는 경쟁차종의 출시,소비심리 등 시장상황이 급변해 신차 가격을 쉽게 정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르노삼성 관계자는 "신차공개 후 시장상황 진단과 함께 소비자들의 반응을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가격을 최종 결정한다"고 말했다. 소비자들로부터 '가격조정'을 받는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제조원가에 일정 마진을 붙여 가격을 정하는 방식은 옛날 이야기가 됐다. 수입차업체들이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국내 자동차시장도 '공급자 시장(seller's market)'에서 '구매자 시장(buyer's market)'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새로운 옵션을 기본 장착했다 하더라도 제조원가 상승분을 모두 반영하면 소비자들의 가격 저항에 부딪칠 수 있다"며 "제조원가와 소비자의 수용 가능성,경쟁 차량의 가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가격을 정한다"고 설명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