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처녀, 35년만에 '안료 1위' 오르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6일 아침.충남 당진 공장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장성숙 우신피그먼트 사장(57)은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국적과 성별은 다르지만 동갑내기(1955년생)에다 창업연도(1977년,애플은 1976년)가 비슷했던 잡스의 명복을 빌었다. 장 사장은 "잡스는 갖은 역경을 딛고 스스로의 꿈을 이룸으로써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영감을 준 위대한 기업인"이라고 말했다.

백령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장 사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못했다. 12세 나이에 상경,친척집에서 아이를 봐줘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치고 들어간 첫 직장이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페인트 가게 대성사(大成社).직원 10명 남짓한 가게에서 학벌도,기술도 없었던 19세 백령도 처녀는 성실과 원칙적 일처리로 가게 주인의 신망을 얻었다. 그리고 가게가 어려워지자 억척스럽게 모은 돈과 가족 및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당시 돈 600만원에 가게를 인수했다. 마포 산자락 단독 주택값이 200만원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이 23세.

당시 남성 일색이었던 안료(페인트의 원료)업계에서는 "장성숙이 6개월 안에 문을 안 닫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여자야 시집가면 그만인데 거래는 무슨 거래"하는 얘기가 나왔다. 편견과 차별이 장 사장을 단련시켰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는 남성 경쟁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교적 거래관계가 깨끗했던 대기업과 외국계 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기를 3년.드디어 돌파구가 뚫렸다. 독일계 특수화학제품 회사인 랑세스(Lanxess)와 거래를 트게 된 것.그때까지 분말형태 안료를 됫박 단위로 팔던 장 사장은 반제품 형태의 안료 분말을 수백t단위로 수입,이를 완제품 형태로 새한미디어 같은 대기업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옷(염료가 들어감)을 제외하고 고무 플라스틱 피혁 콘크리트 등 색이 들어가는 모든 자재에는 안료가 들어간다.

랑세스와 거래를 튼 지 30년 만에 우신피그먼트는 이제 400개 국내외 기업에 '아쿠알러(Aqualor)'와 '지올러(Geolor)'라는 이름으로 액상 · 분말 안료 완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국내 안료시장 점유율은 약 40~50%. 올해 매출 목표는 400억원.

물론 위기도 많았다. 거래업체 부도로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을 위기도 있었다. 자녀 교육문제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직원들이 뭉텅이로 빠져나가 경쟁사를 차렸을 때는 회사가 휘청거렸다.

장 사장은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은 것은 직원들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자신이 겪은 말 못할 고생을 가족 같은 직원들이 겪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길을 걸었다. 주위에서 부동산 주식에 투자하라는 제의가 적잖았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공장에서 만난 한 직원은 "우신피그먼트는 학자금 의료비 주택자금 지원은 물론 부부관광까지 사원복지에서 누구회사 부럽지 않다"며 "아무도 나가는 직원이 없다"고 자랑했다.

장 사장은 "젊은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영감을 줄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기업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당진=박수진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