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정만으로 빈곤층 구제가 어려울 때 손쉽게 떠오르는 대안이 '금융'이다. 소비여력과 자산구입능력을 당장 늘릴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갚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무주택자를 없애자'는 구호가 나오고,자산버블을 빈곤층도 향유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커지고,표를 의식하는 정치권과 정부의 포퓰리즘이 덧칠되면 자산시장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하다 터지고 만다.

美 '묻지마' 주택 구매→버블 붕괴→빈곤층 '끝없는 수렁'

◆신용도 따지지 않는 주택대출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의 미국이 그랬다. 1970년대 이후 '모든 가정이 집을 한 채씩 소유해야 한다'는 이념이 강화됐고,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와 조지 부시 공화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활성화됐다.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 이사장은 "민주당 카터 정부 이후 모든 가정이 집을 한 채씩 소유해야 한다는 이념이 클린턴 정부 때 강화됐고 공화당의 부시 정부가 이어받았다"며 "돈이 없는데도 몇만달러씩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등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정책이 1990년대 후반 이후 집중적으로 나왔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주택경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1999년 미국 시민단체들은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계층이 부동산 붐에서 소외됐다"며 대출조건 완화를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여 클린턴 정부는 당시 양대 부동산담보대출 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저소득층 대출 문턱을 낮추도록 지시했다. 주택대출에 필요한 신용 기준과 서류 요건도 그때 대폭 완화됐다.

이와 맞물려 미국 중앙은행(Fed)은 2000년대 초반 연 6.5%에 달했던 정책금리를 연 1%로 끌어내렸다. 저금리로 부동산 시장이 활황 국면에 진입하자 은행들은 앞다퉈 주택대출을 늘렸다. 초기 2년간은 낮은 고정금리로 돈을 빌려준 뒤 이후 28년 동안은 높은 변동금리를 적용하는 '2+28'대출을 내놓았다. 집값이 올라야만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아나갈 수 있는 구조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에선 시민단체들이 부채상환능력에 관계없이 서민들에게 주택자금을 얼마나 대출해 주느냐에 따라 좋은 은행과 나쁜 은행으로 구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며 "결국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터지고 버블이 꺼졌다"고 말했다.

◆무너진 중산 · 빈곤층

버블이 커질 때에는 과도하게 빚을 내 집을 산 빈곤층도 좋았다. 거품이 꺼지자 속살이 드러났다. 중산층마저 탈출구 없는 함정에 빠졌다. '누구든 집을 가질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은 산산조각났다. 주택을 압류당하고 내쫓기는 극빈층을 양산했다.

미국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4인가구 기준 소득이 최저생계비(2만2314달러)에도 못미치는 빈곤층 비율은 지난해 15.1%로 1993년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특히 흑인과 히스패닉은 이 비율이 27%와 25%에 달했다. 빈곤층이 버블 붕괴의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빈곤층 인구는 4620만명으로 2009년(4360만명)보다 260만명 늘었다.

중산층도 실업과 집값 · 주가 하락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해 미국 가정의 중간소득(전체 가구소득의 중앙값)은 4만9445달러로 최고치인 1999년(5만3252달러)보다 7%가량 떨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이 1960년대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전으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이명활 한국금융연구원 국제거시금융연구실장은 "위기가 터졌을 때 더 어려운 계층이 피해를 봐 양극화가 심화된다"며 "최근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도 버블 붕괴에 따른 양극화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말했다.

◆반복되는 역사

금융의 힘을 빌어 경기를 부양하고 저소득층을 지원하려는 유혹은 전 세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1980년대까지 고속성장을 거듭한 일본 은행들은 국민에게 저금리로 돈을 빌려줘 부동산 초호황기를 맞았으나,1990년대 초 버블이 터지면서 '잃어버린 20년'을 보내야 했다. 유럽 국가들도 주택붐으로 경기를 부양하려다 미국과 비슷한 위기에 빠졌다.

한국도 다를 게 없다. 정부의 내수소비 진작과 저소득층 지원 정책에 맞춰 금융사들이 소득이 없는 계층에까지 신용카드를 남발했다가 2004년 카드대란에 빠졌다. 그 후 이자만 갚는 거치식 주택담보대출로 가계부채를 눈덩이처럼 키웠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돈이 없으면서도 집을 사는 저소득층에 대출을 너무 많이 해주는 것은 문제"라며 "자기 책임의 원칙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