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대한민국은 '고령화'라는 험난한 파고와 맞서 싸워야 한다. 고령화는 바로 국가재정 문제로 귀결된다. 그 가운데 '공적연금'이 놓여 있다. 일부 선진국에서는 국민의 노후재원 마련을 지원하고 동시에 국가재정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의 연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또 퇴직연금 같은 사적연금에 대한 국민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각종 '당근(세제혜택)과 채찍(의무가입)'을 활용하고 있다.

◆미국,퇴직연금 강제가입 추진

미국의 연금제도는 기업 주도로 발달해 왔다. 1875년 철도운송회사 아메리칸익스프레스가 우수 인력 유치를 위해 연금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시작이다. 미국의 퇴직연금시장은 꾸준히 성장해 2011년 3월 말 기준 자산 규모가 18조1000억달러에 이르렀다. 전 세계 연금시장의 50%에 해당하는 규모다. 가히 퇴직연금 종주국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퇴직연금 종주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실제 퇴직연금 혜택을 받는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절반에 불과하다. 2008년 미국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 근로자 중 불과 14%만이 퇴직연금에 가입하고 있다. 미국의 퇴직연금제도가 법률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종업원에게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복리후생 서비스의 일환으로 시작된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락 오바마 정부는 2009년 9월 미국의 모든 근로자가 퇴직연금제도에 자동으로 가입하도록 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원하는 사람만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근로자를 강제로 퇴직연금에 가입하게 한 다음 원하는 사람에 한해 탈퇴할 수 있도록 기본 옵션을 바꾼 것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이 대부분 자신에게 엄청난 불편이 없는 한 주어진 상황을 바꾸지 않는 '현상유지 편향'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일단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이를 취소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근로자가 노후자금을 적립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하는 셈이다.

◆칠레,공적연금 민영화로 재정난 극복

1970년대 칠레는 비효율적인 연금자산 운용과 인플레이션으로 연금제도 붕괴를 경험했다. 당시 칠레 정부는 국가 재정의 절반을 구멍난 공적연금을 메우는 데 사용했다. 칠레 정부가 연금개혁의 칼을 빼든 것은 1981년이다. 공적연금 운용을 민간기업에 이양한 것이다. 제도개혁으로 공적연금에 납부하던 돈을 '민간연금기금회사'에 납부하게 됐다. 근로자는 의무적으로 급여의 10%를 개인별로 독립된 연금저축계좌에 적립했다. 본인이 원하면 추가로 10%를 납부할 수 있다. 정부는 추가납부를 유도하기 위해 비과세 혜택을 줬다.

공적연금 민영화를 두고 '국가가 연금지급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난도 일었다. 하지만 칠레 정부는 국가재정 문제와 민간기업의 효율성을 내세워 국민을 설득했다. 대신 연금이 안정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연금기금감독원을 둬 연금관리회사를 감독하고 매년 평균수익률에 미달하는 연금관리회사의 자격을 박탈했다. 연금관리회사가 파산하더라도 연금자산은 압류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보장했다.

칠레의 연금개혁은 민간의 효율성과 정부 규제가 조화를 통해 휘청거리던 공적연금을 개혁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페루,아르헨티나,콜롬비아 등 주변국가가 칠레식 연금개혁을 단행한 점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호주,국가가 퇴직연금 가입을 강제

호주의 퇴직연금제도인 '슈퍼에뉴에이션(Superannuation)'을 호주 사람들은 애칭으로 '슈퍼펀드'라고 부른다. 구조는 의외로 간단하다. 회사가 근로자 임금의 일정 부분(9%)을 떼어 종업원 계좌로 적립한다. 이를 근로자가 원하는 펀드에 투자해 은퇴할 때까지 운용한다. 물론 투자하던 펀드를 다른 상품으로 전환할 수 있고 회사를 옮길 때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확정기여(DC)형 제도와 유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국가가 연금가입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주에서 기업주들은 반드시 근로자 급여의 9% 이상을 슈퍼펀드에 납입해야 한다. 그리고 근로자가 원하면 추가로 적립할 수 있다. 이때 호주 정부는 세제감면혜택을 줘 근로자의 추가납입을 유도하고 있다. 일반 근로자들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율은 30%가 넘는 데 비해 슈퍼펀드에 추가로 납입한 금액에 대해서는 최저세율(15%)을 부과한다.

슈퍼펀드의 진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소득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슈퍼펀드에 적립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최대 1000호주달러까지 정부가 동일한 금액을 지원해 주는 보조적립제도(co-contribution)도 실시하고 있다. 도입 초기 슈퍼펀드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국민은 점차 자신의 노후를 맡겨도 되겠다며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2011년 3월 말 기준 호주 슈퍼펀드 기금 규모는 1조3160억호주달러(약1520조원)에 이른다. 호주 주식시장 시가총액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영국,저소득층엔 공적지원

영국 정부도 재정부담을 덜기 위해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을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저소득층에 대한 공적 지원은 강화하는 반면 고소득층의 노후보장은 사적연금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보면 두드러진다. 영국의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은 37%로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편이다. 하지만 소득계층별로 나눠서 비교해 보면 저소득층 소득대체율이 53.8%로 고소득층(22.6%)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영국 정부는 합리적으로 사적연금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다. 퇴직연금 또는 개인연금에 가입한 사람에 대해서는 공적연금의 소득비례 부분에 해당하는 보험료 납부를 면제해줬다. 그 결과 1987년 공적연금 소득비례부분의 가입자는 약 505만명으로 1979년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졌다. 대부분이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으로 이동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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