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도이체방크의 매출 약 70%를 홀로 일군 인물."(블룸버그통신)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제치고 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금융인."(영국 금융전문 주간 파이낸셜뉴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수장으로 내정된 안슈 자인 도이체방크 기업 및 투자은행부문장(48 · 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 7월 이사회에서 일찌감치 차기 회장으로 선출돼 내년 5월 도이체방크 회장직에 오르는 그는 요즘 단연 유럽 금융가의 화제다. 인도 사람으로 독일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영국 국적의 이방인으로서 독일의 대표 은행 수장 자리를 꿰찬 것만 주목을 끄는 게 아니다.

지난해 도이체방크 전체 순이익의 86%를 자신의 사업부문에서 창출한 걸출한 실력에 세계 금융계가 놀라고 있다. '순이익 제조기(profit maker)'라는 별명은 그냥 붙은 게 아닌 셈이다. 경이적인 수익을 바탕으로 보수적 경영의 대명사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이체방크의 기업 풍토를 "확 바꿨다(tranasformation)"(미국 CNBC)는 평가도 받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는 '각종 루머에 휩싸인 미스터리한 인물'(독일 일간 디차이트)이라는 의혹도 제기한다. 그러나 보수적 성격이 강한 독일에서 '굴러온 돌'이 인맥과 학연,지연의 장벽을 극복하고 '박힌 돌'들과 융합해 장기적인 전문경영인 성공시대를 일궈 나가고 있다는 게 더 관심을 끌고 있다.

◆형식은 투톱,실제는 자인 단독체제


최근 도이체방크 이사회는 요제프 아커만 회장이 내년 5월 임기 만료로 물러나면 '투톱 경영체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카이저(황제)'란 별명처럼 세계은행협회(IIF) 회장을 겸임하며 유럽 금융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아커만 회장의 뒤를 잇는 자리에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자인 기업 및 투자은행사업 부문장과 위르겐 피트셴 독일사업부문장(62)을 동시에 내세운 것.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등 독일 언론들은 '자인을 위한 특단의 조치'라고 해석했다. "도이체방크 조직 내에서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인 부문장에게 한 순간에 전권을 넘기는 게 부담스러워 등장한,자인을 위한 편법"이라는 진단이다. 블룸버그통신도 "도이체방크가 자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은행 최고경영자(CEO) 직을 둘로 쪼개는 강수를 뒀다"고 분석했다.

모두 탁월한 투자실적을 거둔 자인 부문장이 도이체방크를 사실상 접수했고,은행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는 설명이다. 형식상으로는 공동 지도체제를 취했지만 피트셴 부문장에겐 자인 부문장의 약점인 독일 정 · 관계 네트워크 관리를 보완하고,자인 부문장을 보좌(?)하는 보조적인 역할만 주어졌다.

◆천재적인 '머니 메이커'


인도 자이푸르 출신인 자인 부문장은 도이체방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도를 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맡고 있던 기업 및 투자은행 부문의 매출은 2008년 32억유로에서 그 다음해 188억유로로 6배 가까이 뛰었다. 금융위기의 한파 속에서도 실적이 큰 폭으로 성장한 것에 세계 금융계가 주목했다. 작년엔 300억유로로 늘어 실적 호전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도이체방크 전체 매출(442억유로)의 68%,순이익(34억유로)의 86%가 자인 부문장이 맡고 있는 분야에서 나온 것.올해도 은행 매출의 70% 이상이 기업 및 투자은행사업 부문에서 나올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같은 그의 모습을 두고 '반인반신(demigod) 같다'고 평했다. 그가 지난해 1190만유로(177억원)의 연봉을 받으며 아커만 회장(880만유로)을 제치고 최고 연봉자 자리에 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자인은 32세 때인 1995년 도이체방크에 합류했다. 당시 세계 최대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다니던 그가 도이체방크로 이적한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때만 해도 도이체방크는 투자은행 부문에서는 군소 은행 중 하나에 불과했다. 보수적인 경영으로도 유명해 도전적인 배고픈 뱅커에게 어울리는 직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4년 도이체방크의 명함을 들고 다닌 지 10년 만에 기업 및 투자은행사업 부문을 맡으면서 자인은 '변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가 거대 도이체방크의 보수적인 문화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무기는 '신속함'이었다. 각종 파생상품 등을 다루는 투자은행 부문은 고객의 요구와 시장 상황이 가장 빠르게 변하는 분야 중 하나다. 자인 부문장은 "극단적으로 신속하면서도(extremely fast) 언제나 가장 업데이트된 투자 방식을 적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평을 받을 만큼 과단성있는 결단을 내렸다.

독일 일간 디차이트는 "어떤 문제든 해법이든,이메일이건 휴대폰 문자 메시지건 간에 자인 부문장은 늦어도 몇 분 안에 결론을 내고 답신을 날린다"고 전했다. 정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건너뛰고 긴급 대응팀에 말 그대로 '벼락치듯'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다반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초고속 의사결정 배경엔 철저한 정보 분석


자인 부문장이 이처럼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배경에는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파악하기 전에는 만날 약속을 잡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디차이트는 그의 골프 친구들 발언을 인용해 "자인은 자신의 한계를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어서 이기지 못할 게임은 시작도 안하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투자 리스크 분석에 신중하기로 유명한 그의 특징은 이런 성향에서 비롯했다. 투자 팀원이 "어떤 주식이나 채권이 저평가돼 있다"고 보고하면 그는 언제나 "그렇게 좋은 주식이나 채권의 값이 싼 이유가 뭔지 밝히라"고 집요하게 추궁한다는 게 현지 언론의 전언이다. 이 같은 완벽주의적 성향은 스스로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비즈니스 파트너와의 대화도 아주 빠르고 간단명료하게 진행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삶과 업무가 군더더기를 최대한 배제한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관심은 '천재적 이방인'인 자인 부문장이 독일 내 순혈파들과 어떻게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느냐에 쏠리고 있다. 독일 주요 은행에서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인사가 수장을 맡은 적이 없다. 게다가 자인 부문장처럼 런던에 기반을 두고 활동해온 투자 부문 전문가가 독일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를 장악한 것도 처음이다. 도이체방크 직원들은 "자인이 학창시절부터 각종 도박을 즐겨온 '갬블러'이면서 매우 종교적인 사람으로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식의 출처 불명의 루머 외에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고수익을 창출하는 것과는 또 다른 큰 과제가 인도 출신 스타 경영인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