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파이터'로 불리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칼끝의 방향을 바꿨다. 물가가 아닌 경기가 타깃이다. 물가 안정보다는 경기 부양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금리 인상을 일단 유보한 것이다.

장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는 29일 유럽연합(EU)의회의 경제 및 통화위원회 자문회의에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에 중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트리셰 총재는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이 앞으로 몇 개월간은 ECB의 목표치인 2%를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다음달 초 발표할 경제 전망치와 함께 물가가 실제 어느 정도 올라갈 것인지 다시 따져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리셰 총재의 발언에 대해 "트리셰가 지난 4일 ECB 통화정책이사회에선 '인플레 발생이 우려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한 달도 안 돼 톤이 바뀌었다"며 "이번 발언은 음울한 경제 전망 때문에 (ECB의) 금리정책 기조가 급선회한 것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통신 등이 '연내 ECB의 추가 금리 인상이 없을 것'으로 해석한 가운데 로이터통신은 "내년 초 ECB가 금리를 낮출 확률이 30%에 이른다"는 진단까지 내놨다.

유로존의 통화정책을 전담하는 ECB는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을 모델로 만들어진 만큼 그동안 통화정책에서 분데스방크와 유사하게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잡아왔다. 홈페이지에 "물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primary objective)"라고 명시할 정도다. 유로존 재정위기 충격에도 인플레를 견제해야 한다며 금리 인상 기조를 고수했다.

하지만 올 2분기 유로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0.2%로 1분기(0.8%)에 비해 크게 둔화되고,유로존의 '경제엔진'인 독일마저 2분기 GDP 증가율이 0.1%로 사실상 '제로성장'에 머물자 태도가 바뀌었다.

FT는 "ECB는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에 육박한 올해 4월과 7월에 잇따라 금리를 인상했다"며 "미국 중앙은행(Fed)이나 영국 중앙은행(BOE)과 달리 ECB는 인플레에 두드러질 정도로 강경자세를 보여왔지만 경기침체와 재정적자 위기 탓에 향후 통화정책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유럽의 경제성장이 미약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유동성을 줄이는) 금리 인상 결정이 늦춰지고 금리 인하와 경기 부양 등을 고심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