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 안건 일시 상정과 사외이사 불성실도 문제
"기업소송 때 사외이사 법적 책임 묻는다면 개선될 듯"

사외이사들은 거의 모든 안건에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아 대주주의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1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지난해 100대 상장사들의 사업보고서에는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안건별 찬반이 기록돼 있으나 `반대'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기업의 주요 안건을 심의하는 사외이사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실종된 사외이사의 견제와 감시 기능을 회복하려면 전문성과 독립성을 높이고 기업 소송 때 법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주문했다.

◇ 사외이사 원안가결 일색
사외이사들은 거의 모든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지난해 100대 상장사의 이사회 안건 2천685개 중 사외이사의 반대로 부결된 것은 0.15%인 4건이었다.

찬성이 아닌 의견(반대, 보류, 기권, 수정의결, 조건부 찬성)을 한 번이라도 제시한 사외이사는 전체 466명 중 9.8%(46명)에 불과했다.

90.2%인 420명은 지난해 모든 안건에서 `원안찬성' 의견만 낸 셈이다.

이사회 전체회의는 물론 경영위원회나 윤리위원회, 감사위원회 등 분과위원회에서도 회사가 내놓은 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원안가결' 일색이었다.

사외이사들은 ▲임원 특별상여금 지급 ▲계열사 유상증자 참여 ▲회사채 발행한도 승인 ▲이해관계자와 거래 승인 ▲타 법인 출자 ▲외화 차입 등 소액 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안건도 100%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런 현상은 사주가 있는 대기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작년에 9차례 이사회를 통해 31개의 안건을 처리했으나 사외이사 4명 중에서 반대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사회 산하 내부거래위원회는 대규모 내부거래를 심의했으나 소속 사외이사 3명이 모두 찬성했다.

현대자동차도 작년에 이사회를 13차례 열어 28건을 심의했지만, 사외이사 4명은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최대주주와의 거래 승인, 계열사에 대한 유상증자 등의 안건이 사외이사의 100% 찬성으로 통과됐다.

LG화학 이사회도 임원에게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는 방안 등 24건의 안건을 심의했지만, 반대의견은 없었다.

사외이사들이 한 번이라도 안건에 반대나 보류 의견을 제시한 경험이 있는 기업은 100개 기업 중 신한지주, KB금융, 한국전력, KT&G, 금호석유, 강원랜드, 외환은행 등 7개사에 그쳤다.

이들은 금융회사이거나 공적 성격이 강한 기업들이다.

◇ 형식적 심의와 불성실도 문제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신세가 된 데는 상장사들이 한꺼번에 무더기 안건을 이사회에 상정하는 것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상장사들은 1년에 10차례 안팎의 정기ㆍ임시 이사회를 연다.

따라서 사외이사들은 평균 1개월에 한 번 정도 전체 이사회에 참석하게 된다.

수많은 안건을 한꺼번에 처리함으로써 형식적인 심의를 할 여지가 많다는 얘기다.

롯데쇼핑은 작년에 14차례 이사회를 열어 모두 87개의 안건을 처리했다.

지난해 4월22일에 열린 6차 이사회에는 `홍콩 현지법인 자본금 증자' 등 무려 12건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사외이사들은 모두 찬성했다.

한화케미칼의 사외이사 3명은 1월13일 열린 이사회에서 10개나 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불성실 사외이사도 상당수 발견됐다.

두산의 한 사외이사는 전체 이사회 15차례 중 7차례에는 나오지 않았다.

현대모비스의 한 사외이사는 본인의 임기 중에 열린 6차례 이사회 중 2차례에만 참석했다.

한라공조의 이사회 17차례 중 절반이 넘는 9차례에서 사외이사는 1명만 참석했다.

2명의 사외이사 중 1명이 불참했기 때문이다.

현대증권의 모 사외이사는 1년 참석률이 45%에 그쳤다.

동국제강의 일본인 사외이사는 22차례 이사회에서 18차례나 불참했다.

현대상선의 홍콩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는 16차례 이사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작년 3월8일 개최된 오리온의 이사회에서는 사외이사 전원(2명)이 불참한 가운데 경영자 보상제도 개정 시행안이 통과됐다.

◇ 사외이사 전문성ㆍ독립성 부족 탓에 무기력
사외이사들이 반대 의견을 못 내는 것은 대주주와 특별한 관계에 있거나 회사측에 반대할 만큼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회사 경영진이 올린 안건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어 반대를 못 하거나 독립성이 부족해 찬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반적이다"고 말했다.

작년까지 은행에서 사외이사를 지낸 한 금융권 출신 인사는 "안건에 반대를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한계가 있다.

대주주 쪽 이사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므로 아무리 사외이사가 의견을 내놔도 결과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털어놨다.

사외이사들의 반대의견이 많은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유통기업의 한 사외이사는 "이사회 안건이 반대 없이 가결됐더라도 회사가 잘 운영되고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다.

의사결정 이전에 집행부와 이사가 충분히 교감이 이뤄졌다면 반대표를 던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제는 경영진의 의사 결정을 지연시키고 도전적 투자를 어렵게 하거나 중요한 기업 정보를 유출하는 단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가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함으로써 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하려면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했다.

현행법상 사외이사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추천을 거쳐 주주총회에서 선임된다.

후보추천위는 사내이사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어 독립성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금융권 임원을 지낸 은행 사외이사는 "대주주가 일방적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특히 은행 등 공공성이 있는 기업이나 국가적인 기간산업 등의 사외이사는 공익을 대변하는 인물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의 이지수 변호사는 "국내 기업과 관련한 소송에서 이사 책임에 너무 관대한 것 같다.

사법부가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사외이사들도 법적 책임에 부담을 느낀다면 지금보다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강종훈 이유미 기자 keunyoung@yna.co.krdouble@yna.co.krgatsb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