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스위스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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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로마에서 예금 유치활동을 하던 스위스은행원 2명이 체포됐다. 이탈리아 검찰은 예금주 신원을 알려주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한 명은 예금주 신상을 밝혀 석방됐으나 다른 한 명은 비밀을 지켜 실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은행원은 고객 비밀을 지키도록 규정한 스위스은행법에 따라 기소돼 벌금을 물었다. 반면 이탈리아에서 복역 후 돌아온 은행원은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
스위스은행 비밀주의는 16세기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온 위그노(칼뱅파 신자)들이 귀족들의 예금을 비밀리에 관리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비밀보장이 은행법에 공식 명시된 건 1934년이다. 스위스은행에 돈을 예치한 유대인 명단을 달라는 나치의 요구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공개를 꺼리는 자금이 대거 몰려들었다.
스위스에는 400여곳의 은행이 있으나 거액 비밀예금을 취급하는 곳은 120개 정도란다. 2~3층짜리 건물에 간판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비밀 계좌를 열려면 예금액이 10만 스위스프랑(약 1억2800만원)이 넘어야 한다. 이름 대신 숫자나 문자로도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예금주 정보는 담당 직원과 극소수 간부만 안다. 비밀을 누설하면 최고 6개월 금고형이나 5만 스위스프랑(약 64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비밀계좌엔 이자도 붙지 않는다.
스위스은행도 '검은 돈의 은닉처'를 공개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가 거세지자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2008년 UBS는 미국의 압력에 탈세 혐의 고객 4400여명의 정보를 미 국세청에 넘겼다. 독일 영국 등도 자국민 명의 계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스위스와 맺었다. 우리도 지난해 한 · 스위스 조세조약을 개정해 두 나라 조세정보를 교환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거쳐 국내 증시로 우회투자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돈의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5000억원이 넘는 모양이다. 국세청은 9월 정기국회에서 조세조약 개정안이 비준되면 스위스 측에 계좌 내역을 요청할 계획이다. 하지만 스위스가 내역을 공개할지는 불투명하다. 금융산업이 나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돈의 은닉처라는 꼬리표를 언제까지 달고 다닐 수는 없을 게다. 스위스은행의 문이 열리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각국에 적지않은 풍파를 몰고올지도 모른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스위스은행 비밀주의는 16세기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온 위그노(칼뱅파 신자)들이 귀족들의 예금을 비밀리에 관리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비밀보장이 은행법에 공식 명시된 건 1934년이다. 스위스은행에 돈을 예치한 유대인 명단을 달라는 나치의 요구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공개를 꺼리는 자금이 대거 몰려들었다.
스위스에는 400여곳의 은행이 있으나 거액 비밀예금을 취급하는 곳은 120개 정도란다. 2~3층짜리 건물에 간판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비밀 계좌를 열려면 예금액이 10만 스위스프랑(약 1억2800만원)이 넘어야 한다. 이름 대신 숫자나 문자로도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예금주 정보는 담당 직원과 극소수 간부만 안다. 비밀을 누설하면 최고 6개월 금고형이나 5만 스위스프랑(약 64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비밀계좌엔 이자도 붙지 않는다.
스위스은행도 '검은 돈의 은닉처'를 공개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가 거세지자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2008년 UBS는 미국의 압력에 탈세 혐의 고객 4400여명의 정보를 미 국세청에 넘겼다. 독일 영국 등도 자국민 명의 계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스위스와 맺었다. 우리도 지난해 한 · 스위스 조세조약을 개정해 두 나라 조세정보를 교환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거쳐 국내 증시로 우회투자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돈의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5000억원이 넘는 모양이다. 국세청은 9월 정기국회에서 조세조약 개정안이 비준되면 스위스 측에 계좌 내역을 요청할 계획이다. 하지만 스위스가 내역을 공개할지는 불투명하다. 금융산업이 나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돈의 은닉처라는 꼬리표를 언제까지 달고 다닐 수는 없을 게다. 스위스은행의 문이 열리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각국에 적지않은 풍파를 몰고올지도 모른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