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잃어버린 自立의 가치
다른 나라들보다 적은 돈을 복지에 쓰면서도 빈부격차가 적은 사회를 만들어 냈다면 자랑할 일이다.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회였다. 복지 예산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적었지만 전체 가구의 70% 이상이 중산층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빠른 경제 성장과 두터운 중산층을 동시에 일궈낸 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자조와 자립,근검과 협동정신을 끊임없이 북돋운 결과다.

1970년대 우리 농촌을 바꿔놓은 새마을운동 노래의 마지막 후렴구는 '우리 힘으로 만드세'다. '살기 좋은 내 마을'은 국가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1970년 새마을운동 시범사업으로 전국의 3만5000여 농촌에 각각 300부대의 시멘트를 나눠줬다. 이 가운데 1만6000여 농촌에서만 마을길을 포장했고 보를 만들었다. 다른 곳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정부는 이듬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1만6000여 마을에만 철근 1t과 시멘트 500부대를 줬다. 이런 식으로 전국의 농촌들을 경쟁시켰다. 정부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뒤에서 '하늘' 역할만 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사업보국을 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달려든 기업만 지원했다. 한정된 자원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정경유착과 부패도 생겼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에 개도국으로는 유일하게 반도체와 자동차,철강과 석유화학,선박과 각종 전자제품들을 만드는 나라가 됐다.

'해 보겠다'는 자립 의지와 '해 보니까 되더라'는 자신감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핵심 가치다.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 하지만 보수(保守)를 자처하는 집권 여당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오히려 국가에 의지하고 사회에 핑계를 돌리는 풍조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나 노는 학생,등록금을 효율적으로 쓰는 학교나 그렇지 않은 학교를 구분하지 않고 지원하겠다는 '반값 등록금' 구상이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입에서 나왔다.

자립 의식이 세계 어느 곳보다 강했던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의 나라로 전락했을까. 단초는 1997년 말 터진 외환위기일 것이다. 30대 그룹의 절반 이상이 부도를 냈고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 이후 기업들은 '관리형 모드'로 전환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잘려나갈 일을 더 걱정하기 시작했다. 도전 정신을 상실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정치권이다. 눈앞의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대중의 정서에 영합했다. 무너진 국민의 자립 정신과 자신감을 복원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세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일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최저생계비를 보장해주는 기초생활보장제도,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주는 기초노령연금이 대표적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에 이어 반값등록금 주장도 비슷하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의 자유와 자립 의지를 훼손하면서까지 표를 구걸해서는 안된다. 한국에선 보수 정당에서조차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내년 선거가 더 급하다는 표정들이다. 권력자 개인의 이해관계가 당의 이념이나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정당은 필연적으로 포퓰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의미의 정당이 없다. 권력을 좇는 기회주의 정당만 있을 뿐이다.

현승윤 경제부장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