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충격 못 벗어난 일본인] 도쿄 신규 아파트 판매 27% 감소…고층·해안지역은 쳐다도 안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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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기획 글로벌 워치
부유층 대피용 주택 구입…오키나와 미분양 아파트 동나
가족 나들이 크게 줄어…테마파크 매출 50% 급감
직장인 '회식 문화' 사라져…가정용 캔 맥주는 特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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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동남쪽 도요스(豊洲)의 고층 아파트 34층에 사는 회사원 니시무라 다케오 씨(38)는 '내가 왜 이 집을 샀을까'하고 매일 후회한다. 지난 3월11일 도호쿠(東北) 지역을 중심으로 대지진이 터진 날 꼭대기 층의 니시무라 씨 집은 10여분간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집에 있던 니시무라 씨의 부인과 네살짜리 딸은 마치 놀이공원의 '바이킹'을 탄 것처럼 멀미를 했다.
니시무라 씨는 요즘 결심을 굳혔다. 3년 전에 6500만엔(8억5000만원) 주고 산 이 집을 손해 보고라도 팔기로 했다. 결혼 10년 만에 겨우 장만한 집이지만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일본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강타한 이후 일본인의 생활이 바뀌고 있다. 주거환경에서부터 먹을거리,여가활동 등에 대한 인식이 모두 변하는 모습이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생활습관과 문화가 소극적으로 바뀌면서 대부분의 내수품목은 죽을 쑤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사이익'을 누리는 제품도 적지 않다. 일본은 지금 '제2의 지각변동'이 진행 중이다.
◆"좋은 전망? 안전이 우선이지!"
도요스 아리아케(有明) 시노노메(東雲) 등 도쿄만 연안 지역의 고층 아파트는 최근 4~5년간 큰 인기를 끌었다. 한쪽으론 탁 트인 도쿄만을,다른 한쪽으론 도쿄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위치 때문이다. 지금도 40~50층짜리 고층 맨션들이 속속 건축 중이다. 앞으로 2년간 이 세 지역에 공급될 물량만 5000가구가 넘는다.
당연히 층수가 높을수록 웃돈을 얹어줘야 했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 이후 고층 아파트의 매력은 급감했다. 분양에 나선 건설사들은 돈줄이 막혀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들 연안지역에서는 고층 아파트뿐 아니라 저층 아파트와 단독 주택도 인기가 떨어졌다. 지반이 약한 매립지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부각됐기 때문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말로만 듣던 '지반 액상화(液狀化 · 지반이 물렁물렁해지는 것)' 현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이번 도호쿠 대지진으로 도쿄 인근 지바현과 도요스 아리아케 지역에선 지반 액상화로 집이 비스듬히 기울고,보도블록이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부동산 시장의 변화는 각종 수치로도 확인된다. 일본 부동산경제연구소가 집계한 4월 중 수도권(도쿄도 가나가와 · 사이타마 · 지바현)의 신규 아파트 판매는 2336채로 전년 동월 대비 27.3% 감소했다. 1973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4월 통계로는 세 번째로 적은 수준이다. 특히 2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 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83% 급감했다.
반면 일본 열도에서 서남쪽으로 수백㎞ 떨어진 오키나와의 미분양 아파트는 대지진 이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갑자기 수요자가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도쿄에 사는 의사나 변호사 등 부유층들이 비상 대피용 주택으로 구입하고 있다"고 전했다. 내진 설비를 갖춰주는 업체들도 호황이다. 특히 목조 가옥에 대한 내진 설계 요구가 많다. 일본 주택 공사업체인 니토(NITTOH)의 올 1분기 매출은 7500만엔으로 1년 전에 비해 50% 증가했다.
◆"위험한데 나들이는 무슨…."
대지진 이후 일본 사람들의 여가 문화도 대폭 바뀌었다. 벚꽃이 피는 봄이지만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유명 유원지마다 예전에 비해 사람이 줄었고 주택가 인근에 있는 극장과 빠찡꼬도 매출 감소로 고전 중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최근 발표한 '3월 서비스산업 동향'에 따르면 유원지와 테마파크 매출은 229억8500만엔으로 전년 동월 대비 49.9% 급감했다. 이 부문 통계가 새로 개편된 2000년 이후 최대 하락폭이다.
여가활동과 관련된 13개 서비스업종 가운데 11개 업종의 매출이 1년 전에 비해 줄었다. 극장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40% 떨어졌고,골프연습장 이용객도 22.4% 줄었다. 가족단위 외출이 줄어든데다 시설 보수로 문을 닫은 업체까지 겹쳐 감소폭이 커졌다. 도쿄 시부야에 사는 가와나베 도모코 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가던 집앞 빠찡꼬에도 요즘은 되도록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형 가전이나 생활용품을 임대하는 리스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3월 리스업 계약액은 4552억8300만엔으로 전년 동월에 비해 13.9% 줄었다. 가능한 한 집안에 덩치가 큰 가전제품 등을 들이지 않으려는 소비자가 늘어난데다 물류망이 훼손돼 배달마저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 맥주나 마시지 뭐"
지진이 터진 뒤 일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회식이 줄었다는 것.도쿄 아카사카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송화영 씨는 "가게 차리고 요즘처럼 어려웠던 적이 없다"고 걱정했다. 일본 열도 전반에 '자숙 모드'가 확산된데다 개인들도 가족과의 외식을 줄이는 분위기다. 이로 인해 일본 전통주와 양주 등 '회식용 술'은 매출이 대폭 줄었다.
반면 가정용 캔맥주는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진의 영향으로 외출을 삼가는 대신 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4월 맥주 판매량은 1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11.8% 증가했다. 기린맥주는 9개월 만에 전년 동월 대비 증가세를 보였다. 일부 매장에서는 가정용 캔맥주가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생활용품 중에서는 건전지가 단연 인기다. 지진으로 정전이 됐을 경우에 대비해 각 가정마다 건전지 확보에 나선 영향이다. 도쿄 아키하바라의 가전용품 판매점 관계자는 "선반에 진열하자마자 단 몇 분 만에 건전지가 모두 팔려 나갔다"고 말했다. 건전지 업체인 알카라인의 3월 건전지 출하 개수는 1억5000여만개로 전년 동월에 비해 35% 이상 증가했다. 파나소닉 등 대형 업체들이 잇따라 증산에 나섰지만 이달 들어서도 품귀현상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도쿄=차병석/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