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건국 이래 최대 행사라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국제행사가 개최되면 대개 주최국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대표 명주가 건배주나 만찬주로 오르게 마련이다. 이런 술은 행사를 계기로 세계적 명주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유럽의 와인이나 일본의 사케가 그랬다. 중국의 마오타이도 그런 과정을 거쳐 명주로 부상했다.

당연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주가 건배주로 각국 정상들에게 선보여야 할 그 자리에 아쉽게도 우리 술은 없었다. 더 안타까운 건 2009년 제주에서 열린 한 · 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만찬주로 일본식으로 빚은 한국 주류 회사의 청주 제품이 선정된 것이다. 물론 국산 쌀로 빚기는 했지만 일본 청주 제법을 그대로 적용해 진정한 우리 술로 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 술 역사의 맥이 끊겨 일본 술이 우리 술로 오인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본 술과 우리 술은 쌀을 빚어 발효시킨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러나 일본식 청주는 쌀로만 빚을 수 있고,우리 술은 모든 곡물을 원료로 다 사용해 술을 빚을 수 있어 맛과 향이 다양하다. 일본식 청주는 단순하고 경쾌한 맛이 나는 반면,우리 술은 복잡하고 풍부하면서 깊은 맛이 있다.

음식맛이 다르듯 술맛도 한 · 일 간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에 와인과 사케 열풍이 불면서 사람들은 관련 책도 보고 와인아카데미에 나가 공부도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술에 대해선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관심도 없어보인다. 필자는 그 이유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술에 대한 역사적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 술에도 역시 암흑기였다.

조선시대에는 집집마다,고을마다,가문마다 특색 있는 가양주(집에서 빚은 술)가 무려 600여종이 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가 일제 강점기의 문화말살 정책과 주세정책,그리고 해방 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명절이나 제사 때 술을 빚는 것이 금지돼 술을 사서 제례주로 쓰게 됐다. 그러다 보니 일본식 누룩과 주정이 섞인 제례주로 조상께 예를 올리는 집이 늘어났다.

역사를 보면 1700년 전 일본에 술 빚는 법을 전수해 준 이는 다름아닌 백제 사람 인번(仁番)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술을 거르는 이'라는 뜻의 '수수보리'였다고 한다. 와인의 '소믈리에'나 사케의 '기키자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순 우리말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양조법을 전해줬다는데 정작 수수보리라는 말을 일본에서 찾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수천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최근 100여년을 제외하면 술과 술문화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선진국이었다. 단절된 술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선 정부와 학계,민간단체들의 노력 못지않게 국민의 우리 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절실하다.

배중호 < 국순당 사장 jungho@ksd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