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박업계의 큰손인 권혁 시도상선 회장이 국세청으로부터 4000억원이라는 거액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권 회장이 그동안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세피난처(tax haven)'를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실제 사업은 국내에서 하면서도 사업장 주소지는 해외에 두는 방식이었다. 이익은 당연히 사업장 주소지인 조세피난처로 들어갔다.

조세피난처는 각국의 조세회피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금이 전혀 없거나 매우 적은 수준만 부과하는 국가나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됐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고객 명단의 공개를 요구하는 등 조세회피에 대한 대응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세피난처도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됐다.

◆격화되는 글로벌 조세전쟁

스위스의 유명 프라이빗뱅크 '율리우스배르'는 14일 독일 정부에 5000만유로(790억원)를 합의금으로 내주기로 했다. 율리우스배르는 그동안 유럽 각지 조세회피자들의 자금을 비밀리에 유치했다는 혐의를 받아왔다. 이 은행은 최근 독일 정부가 스위스 비밀계좌 보유자 명단을 확보,압박에 나서자 '백기투항'한 것이다.

독일 정부는 이에 앞서 유럽의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로 꼽히는 리히텐슈타인공국을 활용한 부호들에 대해서도 '조세 공격'을 감행했다. 리히텐슈타인 국영은행 격인 LGT에 자금을 맡긴 600여명의 부호에게 세금 1억8000만유로를 물렸다.

지난 연말엔 자금세탁 전문은행 70여개가 집결해 있는 산마리노가 무너졌다.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 주요 은행의 불법자금 거래에 관한 대대적인 감시 · 감독에 나선 이후 돈줄이 말랐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최대 은행인 유니크레디트가 "산마리노 은행들과 더 이상 거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이탈리아에서 산마리노 금융권으로 유입되던 돈의 규모가 순식간에 35%가량 줄었다. 산마리노 금고 안에 쌓여 있던 예금 140억유로 가운데 60억유로가 빠져나갔다. 이탈리아 일간 라스탐파는 "산마리노가 조세피난처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가했다.

재정적자로 허덕이고 있는 미국에서도 조세피난처가 핫이슈가 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법무부가 HSBC 인도와 싱가포르 지사의 미국인 계좌 탈세혐의를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세청(IRS)은 50만달러 이상을 예치한 미국인 VIP고객에 대한 외국은행의 관리 책임을 명문화하는 등 미국인 해외계좌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잉,씨티그룹 등 미국 주요 기업의 조세회피를 다룬 '보물섬'이란 책이 출간되면서 세금 유출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2009년 스위스 UBS의 고객관리 책임자를 미국 자산 200억달러를 은닉한 혐의로 기소하며 조세피난처와 전쟁을 시작했다. 스위스는 결국 자국에 계좌를 보유한 미국인 정보를 미 세무당국에 넘겼다.

최근 들어선 국제기구의 조세피난처 압박도 강화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부터 조세피난처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다. 2009년부터 최근까지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우루과이 코스타리카가 '블랙리스트'에 등재돼 있다. 스위스 벨기에 리히텐슈타인 케이맨제도 등 42개국은 앞으로 조세 관련 국제기준을 지키기로 약속한 '회색 국가군'에 포함됐다.

2009년 런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선언문에는 "재정과 금융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조세피난처 등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각국 간 조세 관련 정보교환을 위한 협약도 급증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세계적으로 세금회피와의 전투가 격렬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7조달러 묻혀 있는 '머니 블랙홀'

이처럼 세계 각국이 조세피난처와 전쟁에 나선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국 경제가 쇠약해진 가운데 조세피난처가 탈세를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금이 조세피난처로 줄줄 새며 재정약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OECD는 2007년 전 세계 조세피난처에 은닉된 자금이 5조~7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만 해도 조세피난처 때문에 연간 1000억달러의 세금이 덜 걷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워싱턴타임스는 "뱅크오브아메리카 한 은행만 하더라도 115개의 해외 조세피난처 지점을 활용해 거액의 세금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세피난처는 중남미 카리브해 도서와 태평양 연안 섬나라,유럽 소국들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 중 버뮤다나 바하마,케이맨제도,리히텐슈타인,모나코,산마리노,마셜제도 등 20여개국이 조세피난처로 유명하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만 페이퍼컴퍼니가 50만개 등록돼 있다. 케이맨제도에는 인구(5만명)보다 많은 8만개의 페이퍼컴퍼니가 진출해 있는 등 규모도 방대하고 내용도 복잡해 과세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조세피난처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테네의 수입세 부과에 반발한 일부 상인들이 아테네 주변 섬을 물품창고로 이용했다. 고대 영국에선 영국 본토와 아일랜드 중간에 있는 '맨 섬'이 세금독립지역을 선언하기도 했다. 현대적 의미의 조세피난처는 1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세금폭탄을 피해 스위스로 자금이 몰리면서 등장했다. 이후 서구 선진국에서 고율의 소득세와 법인세를 피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세금 천국' 조세피난처가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박멸 쉽지 않을 것" 전망

일부에선 사업 특성 때문에 조세피난처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해운회사들이 대표적이다. 선박 등록시 10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홍콩 등으로 이전했다가 탈세 의혹이 불거진 권 회장 사례처럼 글로벌 해운업체들은 조세피난처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운사에 대한 조세 부담과 엄격한 선박 관련 규제 등을 피하기 위해 해운업계가 관행적으로 조세피난처를 활용해온 것이다.

이에 따라 각국의 규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조세피난처가 어떤 형태로든 명맥을 이어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높은 세금을 피하려는 수요는 항상 존재하고,외자유치 외엔 다른 경쟁력이 없는 소국들도 조세피난처의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다. 실제 1960년대까지 조세피난처로 명성을 날렸던 베이루트와 라이베리아,탕헤르는 몰락했지만 이를 대체한 국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