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정이 펄펄 넘치는 '백발 소년'.홍익대 근처 산울림소극장에 가면 언제나 그를 만날 수 있다.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77).진눈깨비가 날리던 24일 오후,그는 막바지 연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얘기를 얼마나 재미있게 하는지,해가 넘어가는 줄 몰랐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고도를 기다리며'.벌써 42년째 해온 작품이지만 그는 "하면 할수록 새롭고 긴장된다"고 말했다. "벌써 1000회도 넘었군요. 새로 올릴 때마다 그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여요. 관객들도 마찬가지죠.지난해 아르코대극장에서 연극올림픽 초청작으로 공연했을 땐 여태까지의 '고도' 중 제일 좋았다고들 하더군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고도는 소극장에서 봐야 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대극장에서 보니 더 좋다'고 해요. "

연극은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소극장 무대가 제격이다. 특히 이 작품은 무대 장치가 단순하고 의상도 한 벌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라는 게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만큼 시공간은 우주 전체이기도 하다.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또 얼마나 귀하고 위대한 존재인가요. 그걸 우주와 대비시켜 보여주는 대극장 공연은 그래서 또 다른 맛이 있지요. "

그는 기회가 되면 큰 무대에 계속 이 작품을 선보일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연기하는 배우들에겐 소극장이든 대극장이든 늘 어렵기만 하다.

"대사 외우기가 무척 어렵거든요. 줄거리가 아니라 동문서답하듯 왔다갔다 하는 대사여서 더 그렇죠.학생들이 와서 텍스트를 펴놓고 연극을 보면서 놀라요. 그 어려운 대사를 완벽하게 하니까. 제가 완벽주의자여서 연기자들을 들들 볶는 편인데,배우들이 힘은 들어도 여기서 제대로 하고 나면 성취감이 크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요. "

그는 '고도'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했다. 1969년 초연 직전의 사연이 재미있다. "충무로의 사보이호텔 맞은편에 '까페 떼아뜨르'가 있었는데 한쪽에 무대를 만들어 놓고 공연했죠.거기에서 헤럴드 핀터의 '덤 웨이터(벙어리 웨이터)'를 올렸어요. 일종의 부조리극이었죠.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하고 컨셉트가 비슷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고도'를 꼭 한번 해보자고 우리끼리 말했는데 한국일보 소극장 개관 공연에서 드디어 초연을 하게 됐죠.그때 원작을 다시 찾아 읽는데 첫 페이지부터 '이거 어떻게 연출하지'하고 고민하며 사흘 걸려 읽었어요. '난적을 만났구나' 싶었죠.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한참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는데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죠.그 바람에 유명세를 타 개막 1주일 전에 표가 다 팔렸어요. 사흘을 더 했는데 그것도 매진됐고.개막 1주일 전에 매진된 건 '고도' 초연밖에 없을 겁니다. 그건 진짜 인연이고 운명이죠.노벨문학상을 받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

이듬해 앙코르 공연을 할 때 그는 극단 산울림을 만들었다. 1985년 지금의 산울림소극장을 마련하고 개관 공연으로 또 '고도'를 올렸다.

'고도'와의 운명은 갈수록 드라마틱해졌다.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때 아르코대극장에서 공연했는데 '부조리 연극'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평론가 마틴 에슬린이 보고 극찬을 하더군요. 곁에 있던 프랑스 기자가 "임선생 아비뇽에도 와야죠"라고 해서 1989년 아비뇽 페스티벌에 가게 됐어요. 2주일 동안의 공연이 끝날 즈음 아일랜드의 더블린 페스티벌 프로그램 디렉터가 찾아와서는 우릴 초청했죠.더블린은 베케트의 고향이잖아요. 꿈만 같았지요. 1990년 더블린 페스티벌에 가서 초연한 날 저녁에 한숨도 못잤어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오전 5시쯤 밖에 나가 신문 가판대에서 '아이리시타임스'를 집으려고 하는데 어,1면에 5단 크기로 우리 사진이 실린 거예요. 제목이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였는데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이젠 연극 그만해도 여한이 없다 싶을 정도였지요. "

이는 그가 해외연수를 다녀오던 때의 충격보다 더 신선한 것이었다. 1982년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쥐라기의 사람들'로 연출상과 연기상을 받은 그는 부상으로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김포공항에서 떠날 때 '그래,좋은 환경에서 신나게 연극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텐데 우리나라에선 백날 해야 안 되는 거구나 하고 속 편히 포기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일본 다 돌아본 뒤 그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걸 보고는 귀국하면서 '어차피 쟤들도 어려운데 앞으로 10년 동안 전력투구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팔아 산울림소극장을 지었다. "지금도 그 얘길 해요. 아내(오증자 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는 목숨을 건 '독립운동 전우' 같죠.집 팔아서 소극장 만드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고마운 전우죠.내 연극에 대해서도 가장 가혹한 객관적 비평가입니다. 빈말이라도 잘했다라는 격려는 안해요. 칭찬해주는 게 딱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운전 잘 한다는 것,또하나는 칵테일 잘 만든다는 거예요. 아,말로는 안하지만 연출가로도 괜찮아 하는 것 같긴 한데…."

소극장을 운영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10주년 무렵 외환위기가 닥쳤는데 그때 '이놈의 극장을 폭파하고 싶다'고 했다가 두고두고 '폭파범' 소리를 들었죠.이젠 내 집이라도 폭파하지 못해요. 사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장소 같은 개념이 돼버렸거든요. "

그는 어린 시절에 그냥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임태식)는 일본 중국에서도 유명한 재즈뮤지션이었고 작은아버지(임훈식)는 우리나라 1호 교향악단 지휘자,그 아래(임근식)는 재즈 피아니스트였지요. 아버지는 제가 열세 살 때 서른셋의 나이로 돌아가셨고,어머니는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죠.할아버지 할머니가 '넌 음악예술 좀 하지 말아라' 하셔서 일단 포기했습니다. "

그렇지만 예술적 기운은 어쩔 수 없었다. 휘문중 1학년 때 개교 50주년 기념작 '마의태자'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연극의 길을 걷게 됐고 피란 중에도 부산에서 공연을 했다.

"부산고,경남고 학생들이 학예회를 여는 걸 보고 우리도 기죽을 수 없다 해서 작전을 짰죠.당시 백두진 재무장관이 동문 선배였는데 장관실에 찾아갔죠.비서실에서 출타 중이라며 안 들여보내주기에 마냥 기다렸죠.가만 보니 결재서류가 들락날락하고 점심상이 들어가더군요. 저 안에 틀림없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기다리는데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나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집무실에 따라 들어가서는 셰익스피어가 어떻고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공연 모금액 목표치인 100만원을 달라고 했죠.마구 웃으면서 '이 사람아,장관 월급이 얼만데 100만원을 내라는 거야?' 하셨어요. 그래서 '요새 월급 가지고 사는 장관 있습니까' 했다가 아차 싶었죠.그 분이 막 웃으면서 '이 친구 큰일날 친구네'하면서 일금 50만원을 쓰시더군요. 예산의 절반을 단칼에 따낸 거죠.서너 시간 만에 70만원이 모였어요. 그걸로 부산 영도극장을 빌려 공연했는데 기획 제작 주연을 제가 했지요. "

그 끼를 살리는 길은 당시 유일하게 연극영화과가 있는 서라벌예대에 진학하는 것뿐이었다. 재학 중 '사육신'으로 본격적인 연출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스승인 김규대 선생의 조연출로 프로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과로 때문에 오른손이 마비돼 고통을 겪기도 했다. "당뇨도 있고 고혈압도 있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담배는 오른손이 마비됐던 23년 전에 끊었고 술은 아직 즐기는 편이에요. 얼굴이 좋아보인다는 것도 괜한 말이죠.힘들고 괴로워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니까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술은 와인이 좋아요. 아내도 와인에 대해선 별로 잔소리를 안하죠.하하."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