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스위스 철학자이자 문학가 헨리 아미엘은 독신으로 살면서 매일 일기를 썼다. 사후 출판된 '아미엘의 일기'는 1만7000여쪽의 방대한 분량으로,자신의 정신적 방황과 당대의 사상 풍속 문명 등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담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마지막 일기에서는 "타인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생애는 종말에 이르러서도 후회뿐이다. 한때 깃털 같았던 너(펜)마저도 이젠 무겁구나"라고 털어놨다. 제네바대 철학 교수로 일하면서 겉으론 평탄한 생애를 살았지만 실은 뼈저린 고독에 시달렸다는 고백이다.

'세기의 영성가'로 불리는 헨리 나웬 신부는 타계 3주 전 캐나다의 장애인 공동체를 잠시 떠나 네덜란드 고향의 가족 친구들과 지내며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일기로 남겼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다. 그는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작고 힘없는 이웃을 사랑하며 친교를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다. 남을 돕는 삶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까지 행복하게 해준다는 걸 보여준다.

마지막 말이나 일기에는 삶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힘이 담겼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작가 로맹 가리는 1980년 자살 직전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는 말을 남겼다. 말년에 대장암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아프리카 구호활동을 폈던 배우 오드리 헵번은 죽음을 앞두고 좋아하던 시를 아들에게 선물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친절한 말을 하세요/사랑스런 두 눈을 갖고 싶으면/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보고/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당신 앞에 있는 음식을/배고픈 사람과 나누세요. "

박완서 선생이 세상을 뜨기 이틀 전 쓴 일기가 월간 '현대문학'에 공개됐다. "병원 가는 날,퇴원 후 바깥 나들이라 며칠 전부터 걱정이 되었는데 잘 다녀왔다. …일기도 메모 수준이지만 쓰기로 했다. /살아나서 고맙다. 그동안 병고로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죽었으면 못 볼 좋은 일은 얼마나 많았나. 매사에 감사…."

평생 상처로 남은 전쟁,남편과 아들을 앞서 보낸 아픔,병고 등을 겪으면서도 매사 감사한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함도 보인다. 크고 화려한 것만 좇다가 뜻대로 안된다고 화내거나 불평하는 일이 잦다면 마음을 잘 가다듬을 일이다. 선생이 일기에 썼듯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 아닌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