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저를 처세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자리에 남들보다 빨리 순탄하게 올랐으니 그런 말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게 다 좋은 것은 아니더라고요. 빨리 승진하는 만큼 물러나야 하는 것도 빠르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은 됩니다. 남들은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건가요?”

40대의 대기업 임원이 필자와 보이차를 마시며 하는 푸념이다. 그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팔자 좋은 소리로 들릴 수 있는데 정작 당사자에게는 걱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 참 어려운 화두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삶의 가치가 제각각인데 어떻게 한 마디로 사는 방식을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옳은 방법이 아닌가 한다. 굳이 모범 답안을 말하라고 한다면 굵고 길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혼란시기에 가후(賈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 군주 밑에 있지 않고 동탁에 이어 조조의 손자 조예까지 여러 군주의 참모로 있었지만 철새 정치인처럼 스스로 옮겨 간 적은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군주의 의심을 받거나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았고 동료들로부터 그 흔한 중상모략도 없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을 짓밟아야 출세할 수 있었던 그 시대에, 그는 가늘지 않게 나름대로 굵고 길게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처세의 달인이었다.

가후가 혼란기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달리 자기 세력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력을 가지면 언젠가는 자기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가후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혼자 마시고 오해를 살만한 짓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 왕족이나 세도가의 집과는 일체 혼인도 하지 않았다.

나서야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았고,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공을 다투지 않는 등 늘 자기관리에 철저했기에, 군주의 역린(驛鱗)을 건드리지 않았고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섣불리 튀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치만 보고 복지부동하는 그런 인간도 아니었다. 정도(正道)를 가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가후는 인맥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여러 명의 군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천수를 누리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인 것이다.

그렇게 살았던 가후를 생각하면 필자는 지인 두 사람이 생각난다. 몇 년 전 고위 공무원이었던 A씨는 공기업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진하기를 바랐으나 특별한 인맥이 없었던 그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인사발표가 나고 필자에게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새로운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었지만 섭섭한 마음은 한동안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하고 싶던 일을 하게 되어 기쁘고, 옛날 후배들도 많이 도움을 주어 의욕이 더 생긴다고 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A 사장의 공기업이 경영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역시 공무원이었던 B씨는 승진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원하던 승진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예전에 담당했던 업무에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원하는 자리는 얻었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극상하면 자멸한다고 했던가.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자기 관리다. 1800여 년 전 가후의 처세방법을 지금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또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세상에서 가후와 같은 처세는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지금이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각자 행복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다. 인생의 굴곡이 있어도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다면 굴곡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삶의 질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입처개진(立處皆眞) 즉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낼 수 있다면 어떤 삶을 선택하든지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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