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요일,서울에 하루 종일 많은 눈이 내렸다. 거실 베란다에서 소담스런 흰 눈으로 채색된 아이들 놀이터를 내려다보니 마음마저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낭만적인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였다.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데 빙판길의 힘든 출근이 되겠구나 싶어 걱정스러움이 앞섰다. 오후 늦게까지도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간간이 골목에서 누군가 눈을 치우는 모습이 보인다. 어차피 눈이 계속 쌓일텐데 굳이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다음 날 출근길 교통 혼잡이 예상돼 여느 때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파트 앞 아스팔트가 단정한 맨얼굴을 드러냈다. 족히 10㎝는 내린 것 같은데….그 많던 눈이 사람들이 지나다닐 공간 만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누군가 이른 새벽에 빗질을 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 딸,혹은 손자들이 다칠까봐 영하 12도의 칼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쓸어낸 그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덕분에 이웃들까지도 고마운 혜택을 누린다.

큰 거리에 나오니 구청에서 나온 분들인지 젊은 사람들이 모여 도로의 눈을 치우는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출근시간이 되기 전에 제설작업을 하려고 서둘렀는지 여기저기 염화칼슘으로 눈을 녹인 흔적이 보였다. 출근길을 재촉하느라 지나치기 바빴지만 마음과 눈빛으로 '고생하십니다'라는 인사를 보냈다. 따끈한 커피 한 잔 건네고 싶은 고마움도 담아서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도착하니 빌딩 주위의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관리하는 아저씨들이 하얀 입김을 불어가며 이른 아침부터 고생했을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오늘 같은 날은 말끔하게 청소된 복도며 머그컵도 새삼 고맙다. 온 세상이 눈에 갇히는 날도,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한파에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분들의 노고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특히 올 겨울엔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릴 만큼 유난히 혹독한 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전에 없던 한파를 이겨내고 적응하기 위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노력하고 있다. 내의를 챙겨 입고,에너지를 절약하는 데 동참하기 위해 18도로 맞춰진 사무실에서는 두툼한 카디건과 무릎담요를 사용한다.

쏟아지는 폭설 앞에 너와 나를 따지지 않고 공무원은 공무원대로,시민들은 시민대로 거리와 도로가 제 기능을 멈추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자기 몸이 힘들고 귀찮더라도 '우리'를 위해 소리 없이 겨울밤을 밝히는 분들이 계시기에 어느 해보다 마음 따스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젠 새벽 단잠을 깨우는 쓱싹쓱싹 빗자루 소리가 오히려 반갑게 들리는 듯하다. 다음번 눈이 내릴 때는 우리 가족들을 이끌고 '새벽의 그분'과 함께 집 앞의 눈을 치울 생각이다.

김영신 < 한국소비자원장 ys_kim@kca.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