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에 많은 분들이 부모님을 뵈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은 받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면에서 장기 기증과 공통점이 있다. 작년 12월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생명나눔 친선대사로 위촉됐을 때 문득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떠올랐다.

40여년 전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서 진해 경화동에서 훈련받던 때였다.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느라 10년이 넘게 어머니 곁을 떠나 있었다. 모진 훈련을 받고 있던 어느 날 구대장이 훈련 중 느닷없이 나를 불렀다. "뒤로 돌아 서"라는 구대장 명령을 따라 뒤로 돌아섰다. 이어 전방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했다. 응시하니 경화동을 인접하여 둘러쳐진 철조망이 보였다. "뭐가 보이나?" "철조망이 보입니다. " "다시 똑바로 봐!" 나는 그제야 철조망 밖에 흰옷을 입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 모습이 틀림없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여기를 어떻게 알았으며 어떻게 찾아왔을까? 여기까지 왜 왔을까? 면회와 접촉이 일절 금지된 곳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식의 만남이라도 이뤄냈을까. 얼마나 졸라댔을까. 어머니와 나는 서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채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지금 계산해 보니 그때 어머니 연세가 예순을 넘어 일흔 가까이 됐을 때였다. 그 먼 길을 노구를 이끌고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의 사랑만큼 위대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몸의 일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준다는 것은 분명 고귀한 일이다. 나는 13년 전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 이런 결단을 내릴 때까지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을 때였지만 '해병대 청룡부대 소대장 시절 베트남에서 수없이 여러 번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이후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야.만약 생명이 다하면 영(靈)은 떠나고 육신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라고 생각하니 장기 기증 결심이 쉬워졌다. 신(神)이 주신 것이니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은 장기 기증을 결심한 순간부터 건강이 좋아진 것이다. 쓸모없는 장기는 가져가지 않는다고 하니,기증할 수 있는 장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저절로 건강을 잘 관리하게 된 것이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는 우유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장기 기증을 결심하는 사람은 더 건강해진다. 장기 기증을 결심하면 사회적으로 칭찬도 받고 자기 건강도 더 좋아지니 '꿩 먹고 알 먹고'이다.

'내 것이니 귀중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바보스러운 사람이다. 반면 '내 것이 아니니 언제나 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괜찮은 사람이다. 물론 장기 기증은 강요나 분위기에 휩쓸려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할 것을 예약한다고 생각하면 결심이 훨씬 쉬워질 수 있다.

전도봉 < 한전KDN 사장 ceo@kd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