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마리가 넘는 소와 돼지를 땅에 묻은 구제역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 풍속도마저 바꿔 놓았다. 구제역이 번질까봐 귀성을 포기한 사람들이 늘면서 고향마을이 텅 비는가 하면,지방권 공원묘지도 예년에 비해 성묘객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반면 서울 등 도심권은 곳곳에서 벌어진 교통체증으로 홍역을 앓았고,놀이공원과 스키장 호텔 등도 귀성 포기자들 덕에 때아닌 대목을 만났다.

◆썰렁한 고향엔 소독장비만

구제역이 휩쓸고 간 축산 농가와 마을에서는 명절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남에서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김해시 주촌면 대리마을(53가구)에는 설 연휴 동안 귀성객이 한 명도 찾지 않았다. 최성대 이장(65)은 "주민들이 구제역 때문에 자식들에게 오지말라고 해 연휴 동안 마을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고 말했다. 전남 함평군 기각리의 박영윤씨(53)는 "마을 사람들조차 바깥 나들이를 자제하는 바람에 명절 미풍양속이 자취를 감췄다"고 안타까워했다.

고향마을 곳곳에는 귀성환영 플래카드 대신 구제역 소독장비가 등장했다. 전남 · 경남 · 강원 등 지방권 공원묘지에도 성묘객들이 예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었다.

설날 당일 광주에서 선친 묘소가 있는 전남 담양군 천주교 공원묘지를 찾았던 김동률씨(46)는 "예년에 1㎞ 이상 꼬리를 물었던 차량행렬 대신 구제역 소독장비가 곳곳에서 손님(?)을 맞았다"며 "오가는 길도 작년의 절반인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 KT에 근무하는 박모 과장(35)은 "소 100마리를 키우고 계신 모친과 조모를 돕고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전남 장흥)에 가려했지만 마을분들이 귀성 자제를 결의해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작년 이맘때 총 140만명이 찾았던 강원도 화천의 산천어 축제도 구제역 파동으로 전격 취소됐다. 김세훈 화천군 문화관광과장은 "군민들의 생계가 당장 막막한 상황"이라며 한숨지었다.

◆도심길 때아닌 '짜증길'

서울 등 대도시 주요 도로나 인근 여가시설은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시민들로 붐볐다. 이 바람에 명절 때 차량이 거의 없던 도심권 도로 곳곳에서 교통체증이 발생해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박경신씨(49)는 "설날 은평뉴타운에 있는 큰댁에서 차례를 지낸 뒤 구기동 집까지 평소 15분 걸리던 길에서 1시간 동안 꼼짝도 못했다"고 푸념했다. 평일에 30~40분이면 충분하던 과천~의왕 구간이나 서울(강서)~인천을 오가는 길도 1시간30분~2시간 넘게 걸렸다.

도심권 놀이공원 등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4일 잠실 롯데월드를 찾은 소비자들은 자유이용권을 끊기 위해 최소 15~20분간 줄을 서서 기다렸다. 롯데월드 관계자는 "지난해 추석 연휴 대비 입장객이 20% 증가했다"고 밝혔다. 홍천 대명리조트,용평리조트 강원도 내 9개 스키장은 2일부터 6일까지 객실 예약이 100% 완료됐고 주변 펜션도 만원사례를 빚었다.

극장,찜질방 등도 대목을 만났다. 목동의 한 상영관을 찾은 회사원 황미정씨(37)는 5일 "어린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러 나왔는데 간신히 표를 구했다"며 극장 안으로 향했다.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이모씨(46)는 "가족이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낸 뒤 함께 찜질방에 갔는데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전했다.

시내 특급호텔과 레지던스 역시 설 패키지 투숙률이 지난해 대비 10% 이상 높았다. 가족과 함께 장충동 신라호텔을 찾은 이성현씨(33)는 "구제역과 한파로 고향에 다녀오기 부담스러워 2박3일 패키지로 호텔에서 묵었다"고 말했다.

김태현/최성국/최진석 기자 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