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鐵)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1979년 영국 총리에 부임했을 때 복지병을 고치기 위해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국영 기업의 대부분을 민영화로 돌렸다. 민영화로 인해 길거리로 내쫓긴 실업자들이 넘쳐나 1979년 4%였던 실업률이 1983년에는 12%대까지 치솟았다. 개혁에 걸림돌이었던 노조 권력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했다. 무분별한 쟁의행위를 막기 위해 노조 무력화정책을 펼쳤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고 개혁 중지를 촉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총리 부임 후 50%를 넘던 지지율은 25%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대처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철의 여인'이란 별명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만이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철학,그리고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처는 외교분야에서도 원칙을 지켰다. 당시 중동에서는 유럽인 납치가 자주 일어났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정부는 자국민이 납치되면 막후협상을 통해 구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처는 '흥정'을 거부했다. 피랍자의 가족이나 일부 언론에선 "피도 눈물도 없냐"고 비난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납치범과의 협상은 또다른 납치를 불러올 것이란 소신에서였다. 이런 고집과 신념은 영국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됐다. 대처는 1982년 벌어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데 힘입어 국민 지지율을 80%대로 끌어올리며 총리 연임에 성공했다. 그의 개혁정책은 좌파정당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중도실용주의인 '제3의 길'로 노선을 바꾸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 세대가 지난 2008년,대처처럼 신자유주의 신봉자였던 이명박 대통령(MB)도 정권을 잡은 뒤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했다. 공공분야와 노동시장을 비롯한 각종 분야에 박혀 있는 '전봇대' 뽑기에 나섰다. 친기업(business friendly)도 이때 가장 많이 외쳤다. 하지만 공기업 개혁은 뒷걸음질 쳤고,노동시장 개혁도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 '친기업,친시장' 구호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버렸고 대신 '중도실용'과 '공정사회'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진보진영의 가치로 인식되던 이들 용어는 MB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면서 출현해 좌파진영에서는 그 진의에 의심을 품고 있고,우파 진영에서는 좌파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을 흉내낸다고 비판했다. 중도실용주의는 2009년 재 · 보궐선거 참패 이후 나왔고 공정사회는 지난해 6월 지방선거 패배 이후 등장했다. 선거에서 패한 뒤 국민들에게 환심을 사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선 인기에 영합하려는 MB의 리더십이 우리 사회를 '복지논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신념과 철학,실력의 부재는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이런 정치적 한계가 복지논란을 불러 일으키도록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08년 6월 "촛불시위를 청와대 뒷산에서 지켜보며 자신을 반성했다"고 고백해 좌파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은 대처 총리 시절과는 경제적 · 정치적 환경이 다르다. 하지만 중심을 잡고 확고한 신념과 철학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젊은 학생들과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금개혁을 꿋꿋이 밀어붙여 성사시킨 일은 MB가 새겨볼 만한 사례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