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라면 자산운용사 간판을 내려야죠.업(業)의 정체성이 흔들릴 정도 아닙니까. " 중견 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의 목소리에서 허탈함이 묻어났다. 최근 A자산운용이 투자자문사의 자문을 받는 공모펀드를 선보일 예정이라는 소식에 대한 반응이었다. A운용은 자문사 두 곳으로부터 자문을 받아 편입종목을 결정하는 공모 주식형펀드 인가를 받고 판매사를 찾고 있다. 자문사를 낀 사모펀드는 있었지만,공모펀드로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운용업계의 반응은 냉랭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으로 치면 운용사가 자문사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공장으로 전락한 셈"이라며 "자문사의 도움을 받겠다는 것은 운용 능력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불쾌해했다. 소수지만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한 관계자는 "꿩 잡는 게 매 아니냐"며 "주식 고수가 직접 골라주고 펀드 수익률도 올라간다면 투자자 입장에선 반가운 일일 것"이라고 평했다.

작년 이래 국내 주식형 펀드에선 약 14조원이 이탈했다. 반면 10대 증권사의 자문형 랩 판매 잔액은 5조5500억원 늘었다. 펀드시장에서 운용사들이 고전하는 사이 일부 '잘나가는' 자문사들은 돈이 몰려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심지어 여의도 증권가에선 "펀드매니저엔 등급이 있는데 A급은 대형 자문사,B급은 중소형 자문사,C급은 대형 운용사,D급은 중소형 운용사의 펀드매니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돈다.

소수 종목에 집중하는 자문형 상품에 대한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상승장이 꺾일 경우 조정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문형'이란 간판만 내걸면 자금이 구름처럼 몰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운용업계가 곰곰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불친절한 운용보고서,오락가락하는 투자원칙,매니저의 잦은 이직 등에 대해 펀드 고객들의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펀드매니저가 주식을 고르는 액티브펀드가 지수를 따라가는 인덱스펀드보다 수익률이 낮은 경우가 더 많다. 펀드 간 편차가 큰 액티브펀드의 특징을 감안하더라도 비싼 운용보수에 비해 신통치 않은 성적이다. 체면을 구긴 운용업계의 '절치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해영 증권부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