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나 챔피언 먹었어!"

1977년 11월 홍수환 선수가 '4전5기 신화'로 세계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감동의 순간.연극 '이기동 체육관'(각색 · 연출 손효원)은 그날을 기억하는 중 · 장년층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이기동이 두 명 등장한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왕년의 복싱 영웅 이기동(김정호)과 대학 시간강사로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내는 노총각 이기동(김수로 · 김서원)이다.

늙은 이기동은 퇴락한 체육관장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복싱이 싫다던 아들 연승에게 복서로 살 것을 강요하다 결국 아들은 16세에 링 위에서 죽고,아내는 떠났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그에게 남은 건 시계도 멈춰버린 낡아빠진 체육관 하나와 복싱 후유증인 펀치드렁크로 말을 듣지 않는 몸,아빠의 반대에도 복서가 되길 고집하는 나이 서른의 딸 연희(강지원 · 손예주)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이 체육관에 관장과 같은 이름의 젊은 이기동이 등장한다. 알고보니 '미친 탱크'라고 불렸던 늙은 이기동의 열렬한 팬이다. 30년 가까이 그를 동경하던 그가 늙은 이기동에게 권투를 배워 보겠다고 나타나면서 체육관에 있던 6명의 인물은 삶의 활력을 찾아가고 갈등 관계도 회복된다.

"쓰러진 놈은 짓밟지 않아.저 스스로 일어나야 하지.어때,멋지지 않아?" 딸이 선수로 뛰겠다는 것을 막던 관장은 결국 딸을 인정하게 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이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동도 덜하지만,1970~1980년대 한국 권투 스타들의 성공 스토리가 만담처럼 섞여나와 잔잔한 웃음을 준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외로운 노처녀,의욕 없는 시간강사,방황하는 여고생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큰 한방은 없다. 이기동 관장이 챔피언이 되기 직전 펀치 한방을 못 날려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과 닮은 연출자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다른 관원들의 코믹 연기와 배우들의 숨소리,땀 냄새가 뒤섞인 권투 장면은 인상적이다. 마지막에는 모든 배우가 나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줄넘기,복싱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때 흘러나오는 영화 '록키'의 주제곡.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복싱 연극에 이만한 노래가 또 있을까. 4만4000~5만5000원.내달 26일까지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02)548-0597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