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경기도 안양 수산물 도 · 소매업체인 K종합상사가 부도나면서 이 회사가 발행한 어음 2000억여원어치가 '휴지조각'이 됐다. 경기도 어음부도율은 사건발생 한 달 전인 2월 0.35%에서 3월 사상 최고치인 1.94%로 급등했다. 당시 지역에선 지역 경제가 무너지는 징후라며 떠들썩했다. 경기도도 부랴부랴 사태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기악화로 빚어진 어음부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규모 업체가 수천억원의 어음을 부도낸 점을 의심한 검찰이 수사를 벌인 결과 경기와 상관없는 대규모 '딱지어음'(부도가 예정된 어음) 발행 · 유통 조직이 관여된 사건으로 파악됐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검사 배성범)는 29일 그동안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K종합상사는 6개 회사 명의로 3272억원어치의 딱지어음을 발행해 유통시키고 부도를 냈다. 검찰은 K종합상사 운영자 박모씨(71) 등 주범 4명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무인가 단기금융업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이들에게 약속어음 용지를 대량 공급해준 A은행 지점장 김모씨(52) 등 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박씨 등 주범들이 2008년 말부터 범행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박씨 등은 K사를 설립한 뒤 회사 명의로 액면가 2112억원어치의 약속어음을 발행한 뒤 3억7000만원에 할인 판매했다. 주범들은 2009년 3월 고의부도를 내 10억원가량의 불법 수익을 올렸다.

이들은 농수산물 유통업에는 부가가치세가 면제돼 세금계산서가 발행되지 않는 점을 악용,농수산물 유통업체를 차려 부가세 납부를 피하고 국세청의 딱지어음 추적을 막은 것으로 조사됐다.

A은행 지점장 김씨는 박씨 등으로부터 6850만원을 받고 약속어음 용지를 대량 공급해주다 적발됐다. 김씨는 K사가 신고한 어음발행 금액과 실제 발행 금액이 10배 이상 차이 나는 등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부하직원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딱지어음 발행 · 유통을 방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초 박씨 등으로부터 어음을 구입한 고객들은 딱지어음인 것을 알면서도 급전이 필요해 고액 액면가의 어음을 할인해 샀다. 이 어음을 담보 등으로 맡겨 물품대금이나 부동산 대금 등을 치르려는 사업자 등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나 이후 어음이 유통되면서 진성어음으로 오인한 고객들에게 비싼 값에 팔리면서 부도 피해액이 1600억~1700억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관계자는 "어음 최종 소지인들은 대부분 소시민이나 영세상인,건설 하청업자 등으로 서민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며 "은행 직원과 딱지어음 조직 일당의 유착이 커다란 서민 피해를 낳았다"고 말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

◆ 딱지어음

고의적으로 부도낼 계획을 세우고 발행해 유통시킨 어음.약속어음은 첫 거래 때 10장만 교부되고 이후 거래실적과 사용정도 등에 비례해 추가로 받을 수 있는 어음이 늘어난다. 이 점을 이용해 사기단들은 처음에는 정상적인 거래로 신용을 쌓고 이를 기반으로 대량의 어음이나 수표용지를 교부받아 팔아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