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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사 뒤집어 읽기] 추앙받던 淸貧…'자본' 앞에선 無能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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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富와 貧의 굴곡진 평가

    중세까지만 해도 가난은 덕목
    근대 들어서자 죄악으로 인식

    부(富)를 빈(貧)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어느 문명권에서든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보다는 빈이 더 높은 가치,더 나아가 신성한 가치로 여겨졌다. 기독교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반면 빈자들은 성자의 이미지를 띠었다. 예수와 성인들은 쉽게 말해 '거지들'이었다. 부자들이 진정 예수의 길을 좇으려 하면 먼저 가진 것을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따라오라 하지 않았던가.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호의호식은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높은 덕목은 아니며,가난하되 덕성을 지닌 청빈(淸貧)이 선비들의 이상이었다. 오늘날 부유함이 반드시 비난의 대상이 아니고 가난이 곧 이상적 덕목이 아니라는 점을 보면 부와 빈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사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 전기만 해도 자기 신분에 합당한 운명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할 따름이지,가난이 곧 고결한 덕목은 아니었다. 사실 이때에는 대부분이 다 가난하다 보니 사회적 차별도 거의 없었다. 여기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11~12세기 이후였다. 경제가 팽창하고 상업이 발달해 돈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때는 경제 성장과 종교의 흥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특별한 시기였다. 탐욕이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가난이 영적 가치를 띠게 됐다.

    특히 예수와 같이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경우가 가장 존경의 대상이 됐다. 프란체스코파나 도미니코파 같은 탁발승단(托鉢僧團)도 이런 맥락에서 형성됐다. 사회에 부가 쌓이고 빈부격차가 점차 심해지는 때에 교회 역시 부패한 방식으로 축재에 나선 데 대해 비판이 거세어졌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대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스스로 걸인이 돼 고통 받는 하층민 가운데로 들어가 직접 설교했다.

    자선의 이념이 만개한 것도 같은 시기의 일이다. 자선이란 일종의 '되사기'였다. 불어로 자선을 뜻하는 'rachat'라는 단어는 '다시(re-)'와 '사기(achat)'를 합친 말로,이는 이전에 죄를 지어 잃어버린 덕(德)을 돈을 주고 도로 산다는 개념이다. 바로 여기에 빈민의 기능이 있다. 그들은 부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다. 빈민들은 물질적 혜택을 받는 반면 부자들은 구원을 보장받고 더 나아가 그들의 부를 정당화 내지 과시할 수 있게 되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중세 말의 대위기는 이 모든 흐름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큰 변화였다. 기근이 거듭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파탄나면서 수많은 빈민들이 삶의 기반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세 도시에는 걸인들이 넘쳐났다. 147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107명의 걸인이 세금을 냈다는 기록에서 보듯 구걸이 전문 직업이 되기도 했다. '장님 걸인의 길드'처럼 조직화도 되고,심지어 피렌체에서는 3인의 거지가 회사를 결성하기도 했다.

    도시의 외곽지역에 본격적으로 빈민촌이 생겨나고 이곳이 범죄의 온상이자 사창가로 변했다. 이제 가난은 품격 있는 종교적 개념으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가 됐다. 예수와 성인들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우아한 개념상의 빈민과 달리 실제의 빈민은 천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였다. 마치 그때서야 처음 깨달았다는 듯이 사람들은 빈민들이 도둑질을 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신(神)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고 비판했다. 당국은 허가 없는 구걸을 금지하고 수없이 밀려오는 유랑민들에 대해 성문을 폐쇄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16세기 경제가 다시 팽창 국면으로 돌아서고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빈민에 대한 시각과 정책은 결정적으로 변했다. 한마디로 과거에 빈민은 종교적 구원이라는 기능을 띠고 있었던 반면 이제는 공공선(公共善)을 저해하는 역기능적인 존재로 비쳐졌고,곧 가혹한 탄압이 뒤따랐다.

    근대국가의 빈민정책은 요양소에서 빵을 나눠주는 식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끝없이 밀려드는 빈민 앞에서 어느덧 억압적인 조치로 변질되곤 했다. 예컨대 1535년 파리 고등법원에서 통과된 '빈민과 구걸에 관한 법령'은 "몸 성한 걸인들은 공공 취로 사업을 위해 출두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든지,"이곳 출신이 아닌 걸인들은 3일 내에 파리를 떠나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17세기에는 중앙정부가 나서서 빈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감옥에 가두는 유명한 '대감금' 현상이 일어났다. 빈민들을 사역소에 가두고 일을 시키는 내용의 영국 빈민법(Poor Law)은 차라리 '빈민억압법(Law against the Poor)'에 가까웠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근대국가와 자본주의의 성장은 인간관계의 악화라는 대가를 치렀다. 자본주의 체제는 재화의 생산을 거의 무한정 늘리면서도 모두를 부유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다수의 빈민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빈민문제는 자본주의 성장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문제로,이에 대한 대응은 근대 사회의 핵심 과제였다.

    원래 고대적 혹은 중세적 경제 관념에서 재화는 하늘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준 선물(don)이었으며,신의 속성은 우리에게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per-) 준다(don)는 것이었다. 'pardon'의 본래 의미가 이것이다.

    많은 문명권에서 탐욕을 비판하고 가난을 칭송한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허여한 것을 소수가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과 무관치 않다. 이런 의식을 벗어던진 현대사회에서 그렇듯 과연 경제와 윤리는 전혀 별개의 것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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