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고의 행사라는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성공리에 끝났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었지만,실제 이러한 성공의 숨은 주역은 '셰르파'로 불린 실무준비 단장의 협상 역량과 인맥의 힘이었다.

셰르파란 통상 등반대를 정상으로 이끄는 등산길의 안내자를 말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산가의 뒤에는 항상 수많은 셰르파가 있었고,그들 중 목숨을 잃은 희생자도 많았다. 현대 고산등반에서 유능한 셰르파의 존재는 원정의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 요건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훌륭한 국가 지도자 뒤에는 훌륭한 참모가 있었다. 성공한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최고의 경영 성과를 내도록 도운 기업 셰르파도 많았다. 많은 경우 탁월한 리더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아 능력 있는 셰르파를 발탁하지만,인복이 좋아 우연히 만난 훌륭한 셰르파 덕분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지도자도 많아 보인다.

국제회의에 가보면 낮에 열리는 공식 회의에서 토론하고 합의하지만,실제로는 그 전날 환영 만찬이나 호텔 바에서 비공식적으로 핵심 인사 몇 명이 나누는 대화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일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셰르파 기질을 가진 국제전문가를 많이 육성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전문가는 전문지식이 높다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해당 분야 국제회의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쌓아야 한다.

마침 내년부터 우리나라에도 국제회계기준이 도입되고,그에 따라 기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 또한 커질 전망이다. 국제회계기준 제정 단계에서 우리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국제기구에 전문가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 발 앞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준비하지 못했지만,이제라도 긴 안목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예비 셰르파들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며칠 전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숨은 주역이자 셰르파라고 할 수 있는 고 김학렬 부총리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고인은 예고 없이 밤늦게 집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면서도 건강을 생각해 빨리 돌아가도록 눈치도 주었다고 한다. 작년 히말라야 팡보체에서 만났던 셰르파의 부인이 생각났다. 엄홍길 대장을 돕다 결혼 6개월 만에 세상을 등진 남편을 대신해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두 분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에도 그녀는 우리 일행에게 따뜻한 차를 내줬다.

이제 우리도 밖으로 조명받는 지도자보다 숨은 주역과 그 조력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하겠다. 내년 봄에는 그 셰르파 부인도 만나보고,팡보체 초등학교의 아이들과 '딜로이트 선생님'께 인사도 할 겸 카트만두행 비행기표를 한 장 사야겠다.

이재술 <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대표 jaelee@deloitt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