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마지막 실권자 연개소문은 흔히 성정이 잔인,포악하면서도 신출귀몰한 인물로 묘사된다. 임금(영류왕)과 중신들이 자신을 배척하자 평양성 성문 밖에 거짓 열병식을 꾸며 대신들을 초청한 뒤 자신은 칼을 차고 왕궁으로 뛰어들어 임금을 참혹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을 시궁창에 던져버린다. 물론 거짓 열병식에 초대한 대신들 역시 미리 손을 써서 도착하는 족족 모조리 죽인다. 이런 끔찍하고 극단적인 과정을 거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연개소문은 이후 25년간 고구려를 강력한 철권통치로 다스린다. 오늘날로 치면 독재자인 셈이다.

이즈음 역시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아버지를 압박해 당나라 2대 황제에 오른 이세민은 연개소문을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내세운 명분은 반역자 처단과 정의 수호다. 언필칭 천하의 중심에서 변방의 불의를 용납할 수 없어 친정(親征)에 나선다는 데 측근들조차 아연실색했지만 스스로 천자(天子)라는 허울에 사로잡힌 이세민에겐 신하들의 만류가 별무소용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저지른 골육상쟁의 허물 때문에 더욱 주제를 벗어난 과잉반응으로 도덕적인 자괴감을 달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연개소문인들 그런 이세민의 적반하장격 호기가 어찌 가소롭지 않았으랴.두 맹주가 맞붙은 요동벌 전투였지만 결과는 이세민의 참패였다. 중국 역사상 첫 손에 꼽는 명군 당태종이 화려한 장수들과 수많은 병술 지략가,30만명에 달하는 대군과 산더미 같은 기계 공구들,게다가 앞선 수양제의 실패담까지 손에 넣고도 그들은 요동벌을 넘어서지 못한다. 연개소문의 귀신 같은 책략에 번번이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내력을 알면 알수록 연개소문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가 고구려를 다스린 25년간 당조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작은 침략을 감행했으나 고구려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당은 한창 일어나는 세계사의 조류(潮流)였다. 천하의 사람과 문물이 다투어 모여들던 수도 장안은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다. 당연히 당조와 선린 · 우호 관계를 확대해 자국 상인과 백성을 보호,육성하려는 게 당시 주변국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연개소문이 비록 전쟁에서 공이 높아도 역사의 승자로 남지 못한 이유는 세계사의 조류와 화해,교류하지 못한 허물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를 한사코 거부하는 오늘날의 북한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연개소문은 임종에 이르러 아들 셋을 앉혀놓고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럴 만큼 세 아들 사이가 평소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마자 3형제는 서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장남이 중국으로 도망가면서 사태가 종말로 치닫는다.

당조는 망명한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에게서 고급 정보를 입수한 뒤 곧바로 거병하여 고구려를 친다. 그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망하는데 연개소문이 죽고 불과 2,3년 만이다.

겉으로는 당나라의 침략으로 무너졌지만 내막은 자멸(自滅)에 가깝다. 자멸의 이유 또한 세 아들 간의 불화가 아닌,25년 간이나 바깥 세상과 단절하고 교류를 외면한 연개소문의 폐쇄 철권통치에서 찾아야 한다. 주범은 연개소문이다. 국제 판세를 잘못 읽은 외교술,막대한 전쟁비용,그에 따른 백성들의 기아와 궁핍이 원인이다. 아들들은 이미 무너져 내리는 돌무덤에 마지막 돌 하나를 더 얹었을 뿐이다.

생전에 김일성은 고구려를 유난히 흠모했었다고 한다. 북한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자주 공언하곤 했다. 이제 그의 염원이 마침내 이뤄지려는 것일까?

김정산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