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국가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도시의 시대'란 말이 있습니다. 한 도시의 브랜드 가치가 높다는 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경제 · 사회 · 문화적으로 편하게 잘 살고 있어 외부인들이 이 도시에 매력을 느껴 놀러가고 싶고,비즈니스와 투자를 하고 싶고,심지어 이민을 가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계적으로 국가는 230여개나 되고 도시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각 도시는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케팅과 브랜딩이 불가피하게 요구되죠.남다른 전략으로 경쟁의 우위에 선 놀라운 도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 플레이스 브랜딩에서 시티노믹스로

특정 장소를 하나의 상품으로 보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협력을 통해 투자자,거주민,관광객들이 느끼는 장소의 가치를 높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전략적 활동을 플레이스 브랜딩(place branding)이라고 합니다. 이를 보다 크게 도시 운영 관점에서 본다면 시티노믹스(citinomics),즉 도시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스 브랜딩에서 시티노믹스로의 진화를 성공적으로 보여 준 여러 도시 가운데 이탈리아의 슬로시티(slow-city),오르비에토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바쁘지 않으면 비즈니스가 아니다"며 빠르게 살아가지만,광속 트렌드를 거부하고 느리게 살고자 하는 역(逆)트렌드 움직임도 만만치 않습니다. 198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슬로라이프 트렌드는 수세에 몰리기는커녕 동조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1987년 이탈리아 브라시에서 시작된 슬로푸드(slow-food) 운동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1999년 오르비에토와 인근의 그레베 인 키안티,포스타노,브라 등 이탈리아 네 개 도시의 시장들이 함께 만나 음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도시의 삶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치타렌타,영어로는 슬로시티 운동이었습니다.

# 슬로시티의 목적은 행복한 세상

슬로시티 운동의 목적은 인간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오래갈 미래를 위한 두 가지인 자연과 전통문화를 잘 보호하면서 경제를 살려 진짜 사람이 사는 따뜻한 사회,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국제 슬로시티의 모토는 '삶이 편한 도시들의 국제적인 연결망'입니다.

슬로시티 운동의 주요 지향점은 무엇일까요. 첫째,철저한 자연생태 보호.둘째,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셋째,천천히 만들어진 슬로푸드 농법.넷째,지역 특산품과 공예품 지킴이.다섯째,지역민 중심과 정직한 진정성으로 이 운동에 참여해 지방의 세계화를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방자치단체는 어떤 요건을 갖춰야 슬로시티 인증을 받을 수 있을까요. 슬로시티국제연맹 심사단의 까다로운 평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모두 24개 항목을 심사하는데,특히 5개 핵심 항목이 집중적으로 검토됩니다. 우선 인구는 5만명 이하여야 하고,자연환경과 전통적인 산업이 잘 보전돼 있어야 합니다. 또 환경 친화적인 농사법에 의해 자라나는 지역 특산물이 있어야 합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 슈퍼마켓이 있으면 안 됩니다.

# 하늘도시 오르비에토에 가면…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관통하는 강의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움브리아 지역이 나오는데,이곳에는 인구 2만명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가 있습니다. 평지에서 아스라이 떨어져 있는 바위산 위 해발고도 195m에 위치하고 있는 오르비에토는 900년 역사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요새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이른바 하늘도시입니다. 이 지역은 기원전에 에트루리아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12개 도시 중 하나죠.이 도시에는 멋진 관광지가 많아 연간 방문객이 2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그만 도시에 차량 통행이 많아지면서 지반에 균열이 생기고 패스트 문화가 침투해 오자 자신의 전통과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해 슬로시티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슬로시티 세계연맹본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어떤 면을 보면 슬로시티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우선 외관상으로 주민들이 사용하는 자동차 외에는 통행이 잦지 않습니다. 대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농장에서 야채를 직접 기르고 가축을 사육합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주민들도 흙은 충분히 만질 수 있도록 공동텃밭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 장에서는 신선한 과일,채소,치즈가 판매됩니다. 100년 넘은 유명한 빵집에서는 방부제 없는 재료로 만든 빵과 케이크가 나와 있습니다. 시각적 공해를 없애고자 현란한 간판도 없앴습니다. 밤에는 가로등을 거의 켜지 않아 밤하늘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 한국에도 슬로시티 6곳…세계 3위

오르비에토가 슬로시티로 자리 잡게 된 성공요인을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첫째,친환경 먹을거리인 슬로푸드에 대한 인기에 힘입어 이를 슬로시티라는 라이프 스타일 컨셉트로 확장시켰습니다. 둘째,이 도시로 관광객과 자동차가 몰려 들어 환경이 악화돼 문화유산이 위기에 처하자 생존전략으로 슬로시티를 과감히 선택했습니다. 셋째,이 슬로시티 컨셉트를 혼자서만 추진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다른 세 도시와 연대해 함께 추진했습니다. 넷째,슬로시티가 되기 위한 요건을 미리 정한 뒤 실사(實査)를 포함한 인증 제도를 통해 전 세계로 제대로 확장시켰습니다.

2009년 말 현재 17개국 123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선정됐습니다. 이탈리아가 67개로 가장 많고 영국이 8개로 2위,스페인과 한국이 6개로 공동 3위입니다. 우리나라에 슬로시티가 벌써 여섯 군데나 있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흥미롭게도 일본과 중국에는 슬로시티가 아직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이탈리아의 치타슬로국제연맹은 2007년에 우리나라에 실사를 와서 전남의 네 곳에 슬로시티 마크를 부여했습니다. 전남 신안군 증도면,완도군 청산면,장흥군 유치면과 장평면,담양군 창평면이 그곳입니다. 또 2009년에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과 충남 예산군 대흥면,응봉면을 추가로 선정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슬로시티의 취지에 맞지 않게 너무 빨리 슬로시티 인증을 받고 있다는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플레이스 브랜딩과 시티노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정리=이주영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연구원 ope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