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에서 만난 렌고(連合 ·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간부가 수구(守舊)와 진보(進步)란 단어에 대해 우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해 무릎을 친 적이 있다. 그는 "좌파노동단체인 전노련(全勞連 · 전국노동조합연합)은 수구세력이고 온건노선의 렌고는 개혁세력 또는 진보세력으로 통한다"고 소개했다. 우리로 치면 전노련은 민주노총 내 강경파,렌고는 한국노총 내 개혁파라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 그는 "렌고의 노동운동은 개혁을 거듭하며 상생의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틀었고 좌파 세력은 여전히 사용자를 적으로 생각하며 계급투쟁에 집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노련은 세상이 바뀌어도 변화를 거부하며 오로지 노사대립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어 수구세력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힌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도 수구와 진보를 부르는 잣대가 일본과 비슷하다. 자본주의적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은 진보이고 공산당식 교조주의에 사로잡힌 세력은 수구로 분류된다. 독일을 방문했을 때 만난 독일노총 산하 한스 뵈클러재단의 한 연구원은 '좌와 우' 또는 '진보와 보수' 대신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써가며 복지개혁을 단행하는 독일정부를 비판해 인상적이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진보와 수구라는 개념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된다. 진보라는 개념은 사전적 의미로 볼 때 변화,발전 등의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기득권을 잃지 않거나 변화를 원치 않는 수구세력한테도 좌파라면 진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민주노총,민노당,진보신당,환경단체,좌파시민단체 등이 대표적인 진보세력들로 불린다. 이들은 법을 무시하기 일쑤이고 변화나 혁신,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시위나 행사에 주로 선봉대로 나선다.

민주노총은 역사박물관에나 처박아 놓을 법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설을 아직도 신주 모시듯하고 있고 현장 노조간부들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덫에 빠져 스스로 썩어가는 노조도 많다. 식수로 부적합한 영산강의 수질을 개선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환경단체들은 막무가내식으로 반대 목소리를 낸다. 불법 옥쇄파업이 벌어지는 곳엔 민노당,진보신당 의원들이 으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을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나.

박효종 서울대교수는 "한국의 좌파가 진보라는 말에 어울릴 만큼 진보답게 행동했는지,오히려 그 이름에 거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꼬집는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작용하는 수구세력은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진보적 가치는 사회정의,공동체,평등,복지 등 사회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발전적 개념이지 퇴행적 개념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진보와 보수(수구)란 단어를 행동에 걸맞게 부를 때가 온 것 같다. 예컨대 좌파이면서 진보적 사고와 행동을 한다면 '진보좌파',변화를 거부하는 좌파는 '수구좌파' 등으로 말이다. 좌파이념을 갖고 있으면서 시장경제를 중시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 표현처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 싶다. 우파이면서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는 세력들은 어떻게 부를까. 친기업,친시장을 표방하던 MB정권이 친서민 쪽으로 정책을 완전히 틀었다면 '진보적 보수주의' 또는 '진보적 우파'가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정치적 액션으로 끝난다면 '우파 포퓰리즘'으로 부르는 게 적절하겠지만.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